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Ⅰ>
윤한솔 연출의 <안트로폴리스Ⅰ>은 광기와 황홀의 신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술과 음악, 춤이 있어야 하는데 어제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 배우들은 술과 광기로 가득 찬 도시 테베를 충분히 표현한 것 같다. 특히 군무를 보는 듯도 하고 클럽의 댄서 같기도 한 여성 코러스들의 열정적 춤과 노래는 무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흥분과 희열을 관객들에게 전해 주었다. 연극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저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상영한다면 아무리 돌비나 4DX를 동원한다고 해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고(*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 독일어로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안트로포챈(Anthropozän)1)과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가 결합된 말).
현대의 분장실 공간으로 꾸민 1부 프롤로그는 준비과정이었고 2부 디오니소스부터 진짜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한 술의 신이 아니라 파괴와 창조, 광기와 황홀, 억압과 해방의 신이다. 이런 굉장한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는데 빨간 팬티 한 장만 달랑 입고 나타나 소리소리 지르며 여성들을 산으로 몰고 올라간 '시끄러운 신' 디오니소스 역의 조의진 배우나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탄압하려 하는 고용선 배우의 모습은 신이나 왕의 모습이라기엔 차라리 귀여웠다. 고대 디오니소스의 현대적 재해석의 절정은 스크린 위 '자막주의'라는 문장 뒤 펼쳐지는 마치 랩 배틀 같았던 대사의 향연(큰 타이포그라피로 대사 자막을 꽉 채우는 연출이 익살스러웠다)이었다. 마지막에 붉은 피를 몇 양동이나 뒤집어쓰고 열연하는 아가우에 역의 김시영 배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다. 지신의 아들 펜테우스를 짐승으로 여기고 살해하는 끔찍한 장면은 인간이 광기에 사로잡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연습을 많이 한 느낌이 드는 여성 코러스들이 펼치는 광란의 춤과 노래는 고대 디오니소스 제의의 현대적 재해석이며 억압된 여성성과 본능의 해방이었다. 그들 덕분에 디오니소스라는 개념을 '체험'했다고나 할까? 180분 간 이어지는 춤과 노래, 대사와 액션에 관객들은 넋을 잃어 연극이 끝난 뒤에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박수만 치고 있었다. 대단한 경험이었다. 에우리피데스 원작을 각색한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이 5부작은 디오니소스에 이어 우리도 잘 아는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등으로 이어진다. 2부 <라이오스>는 전혜진의 모노드라마로 꾸며진다고 하니 또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윤한솔 연출이 첫 작품을 맡은 이 시리즈 강추한다. 일단 1부는 명동예술극장에서 2025년 10월 26일까지 공연한다.
● 작 에우리피데스·롤란트 쉼멜페니히
● 연출 윤한솔
● 출연 강하 고용선 김시영 김신효 박수빈 박은호 서유덕 심완준 윤자애
장성익 정주호 조문정 조성윤 조수재 조의진 최지현 한지수 홍지인
● 일정 2025년 10월 10일(금) - 10월 26일(일)
● 장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 제작 (재)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