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와 북페어 참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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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 어제는 천리포수목원에 갔다. 아내가 거기서 북페어가 열린다며 열흘 전부터 가자고 했던 것이다. 전날 전주교도소 강연을 마치고 독립서점 '잘 익은 언어들'까지 들렀다 오느라 밤 운전을 오래 해서 꽤 피곤했지만 나도 '천리포수목원 책바슴'이 긍금해 아침에 차를 몰고 태안군으로 향했다. '바슴'은 추수의 의미를 지닌 충남 사투리이기에 '책바슴’은 가을걷이 시기 곡식도 수확하고 좋은 책도 수확하자는 뜻이 된다.
아내는 2002년에 돌아가신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선생을 생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한다. 민병갈 선생은 6.25 때 한국에 와 인연을 맺은 후 귀화해 천리포의 땅을 사서 거대한 수목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특히 목련과 호랑가시나무로 유명한 천리포수목원은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유일 야외 북페어인 '2025 천리포수목원 책바슴'에는 그림책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를 펴낸 싱어송라이터 하림과 소설 '꽤 낙천적인 아이'를 펴낸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 등이 참석한다고 들었다. 나는 소설 '낙천적인 아이'를 들고 아내와 함께 야외공연장으로 갔다. 가수 하림이 건반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싱어송라이터인 하림은 "곧 이태원 3주기입니다"라면서 우리 시대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어 자주 시위 현장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고 말했고 자신의 책 제목과 같은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라는 곡을 한 소절씩 가르쳐 주며 함께 부르게도 했다.
야외무대라 햇볕이 사정없이 얼굴을 가격했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하림이 괴로워하다가 행사 팀에서 녹색 우산을 줬더니 그걸 쓰고는 "진작 쓸 걸 그랬어요. 하하."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나는 잘 몰랐는데 하림은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 같은 노래도 들려주었다. 마지막에 누군가 인생책이 뭐냐는 질문을 했더니 인생책 대신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을 소개하겠다면서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꼭 읽어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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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야외 북페어가 열린 곳으로 갔다. 출판사마다 부스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아내의 눈길을 끈 곳은 2006년생 출판사 대표가 초등학교 6학년인 작가의 책을 펴낸 앵두책방'이었다. 이렇게 어린 사람들이 무슨 책을 내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 이서진' 소개 글 '초등학교 입학 후 책과 문학과 관심을 가졌고 고학년 때부터는 문예창작을 해왔으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라는 내용은 귀엽기만 한 게 아닌 작가적 진정성이 보였다. 과연 책장을 열어보니 사랑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고, 심지어 자살 시도에서 생기는 '주저흔'을 다룬 글까지 있었다.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듯 어리다고 해서 유치하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출판물이었다.
이어서 우리가 구입한 책은 송연정·장희유 두 사람이 2년에 한 번씩 펴내는 '격년제 무크지'였다. 『19.5 어른』과 『21.5 새로운 만남』 두 권을 샀고 앞으로 나올 23세 대의 책도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책들은 정말 북페어가 아니라면 구입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물론 대형서점에서 파는 책들보다 허술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신선한 발상과 실천을 만나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아내는 첫 번째 책엔 띄어쓰기도 틀린 게 많았고 목차 제목에도 마침표를 찍는 등 어리숙한 면이 많아 안타까웠는데 두 번째 책에서는 그런 게 다 고쳐졌더라며 놀라워했다. 그들의 성장이 책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 신기했고 그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책 읽고 리뷰도 써볼게요."라고 했더니 뭐 하시는 분이라고 물었고 나는 작가라고 대답했다. 무슨 책을 쓰셨냐는 질문에 옆에 있던 아내가 "네이버에 편성준 쳐보면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나 '읽는 기쁨' 같은 책이 나올 거예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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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부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의 『꽤 낙천적인 아이』 북토크가 있었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장석주 선생이 이 책 재밌다고 추천하는 글을 읽고 당장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스탠드업 코미디언 된 여성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는데 자신의 이상형이 예수님이라고 하면서도 개신교나 교회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태도가 발칙했고 특히 할아버지 치릴로가 기도를 할 때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에게 천벌을 내려주세요"라고 비는 에피소드가 짓궂은 농담 같으면서도 웃겨서 좋았다.
원소윤은 물건이었다. 역시 햇볕이 내려 쬐는 무대 위에 오른 원소윤 작가는 자신이 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책을 내게 되었는지를 아주 솔직하면서도 재치 있게 설명했다. 책을 내게 된 건 자신에겐 세 가지가 없어서였는데 그건 1) 친구가 없고 2) 돈이 없고 3) 기력이 없어서, 라고 말해 큰 웃음을 주었다. 그 와중에 PPT를 넘겨주는 행사요원의 실수가 반복되자 그것조차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누군가 어떻게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라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느냐 물었더니(장기하나 혁오, 백현진, 이슬아 같은 스타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자신이 이메일을 보내 뽑아 달라고 졸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처럼 필요하면 직접 몸을 던져 해결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어제는 그 밖에도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 달라'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사라들의 '뒷담화'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소설에 나온 에피소드들이 실제 사건이냐" "싱크로율 몇 펴센트냐"라고 계속 묻는 기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컸다. 하도 그런 질문만 하길래 "아니, 기자님들 준비해 오신 질문이 이런 거밖에 없어요?"라고 일갈했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쳐야 했다. 김혜민 PD가 쓴 『좋은 질문의 힘』에도 나오지만 뻔하고 게으른 질문만큼 사람 기운 빠지게 하는 게 없다.
아내는 "앞으로 원소윤은 크게 될 거야."라며 호의를 표했다. 그러나 야외라서 그런지 아니면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작가의 정체성이 부딪혀서인지 북토크라기보다는 토크쇼에 가까워지는 게 안타까웠다. 질문을 할 때 손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진행 요원들이 마이크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림 때는 다 마이크를 대고 질문을 했는데 말이다. 그 도안 진행 요원들이 바꾸기라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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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뒤로 하고 서산에 있는 만수책방으로 갔다. 김환영 선생이 얼마 전 얘기했던, 남편의 이름을 책방 제목으로 삼은 분이 궁금해서였다. 우선 책방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놀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허수정 대표가 책방을 계약할 때는 주차장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책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큐레이션도 다양한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작가의 서가'에 변영주, 이두헌, 김환영, 정지아, 박찬일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추천작이 놓여있는 것이었다. 김환영 작가는 보령에서 자주 뵙는 분이고 정지아 작가는 우리가 좋아서 댁으로 찾아가기까지 한 분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수 하림이 추천했던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이 눈에 띄길래 샀고 아내는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의 새 판본을 한 권 구입했다(오늘 새벽에 일어나 일어보니 '행복의 기원'은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뒤집어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며 다윈의 진화설을 도입한 신선한 컨셉이었다).
오후 5시가 되자 일일 서점원이 지키고 있던 책방으로 허수정 대표가 왔다. 허 대표는 김환영 선생의 부인 임선정 선생과 자신의 남편 '만수 씨'의 인연으로 우리가 책방까지 찾아오게 된 인연이 재미있다며 루이보스차를 내놓았다. 만수 씨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마을의 무슨 행사에 참여해 날라리(태평소)를 불었고 지금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책방 안엔 손님들을 위한 서가도 마련되어 있고 한쪽엔 '서가지기'들의 책을 진열하는 공간도 있었다. 우리는 다음에 또 들르기로 하고 어두워진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