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리뷰
한밤중의 호텔 로비에 윤숙이라는 여자가 앉아 있다. 1948년생, 룩상브르호텔의 장기 투숙자인 그녀는 소설을 쓰는 중이다. 하지만 뭘 쓰느냐는 질문엔 '그저 사소한 이야기들'이라고만 할 뿐 내용을 밝히진 않는다. 자신이 공장 '시다'였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는 동생 경희가 등장하는 글도 쓰지만 정작 소설을 끝까지 쓴 건 단 한 편도 없다.
그녀가 소설 쓰는 것 말고 또 하는 일이 있으니 그건 '질문'이다. 호텔 지배인이나 프론트 직원, 청소부는 물론 체크인·체크아웃 하는 손님에게도 다가가 아무 거나 묻는다. 때로는 입양되었다고 고백하는 영어 잘하는 청년에게 '친부모를 찾아보았냐?'라는 무례한 질문을 해서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런 그녀도 카지노 사업을 한다며 거들먹거리는 연하의 중년 남자에게 "왜 결혼 안 했어요?"라는 폭력적인 질문을 받는 수모를 겪는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찬찬히 대답을 해준다. 결혼은 그냥 안 했고, 1988년부터 이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한 적이 있어서 돈을 모아 장기 투숙을 결심했던 것이라고.
극본을 쓴 신효진 작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걷다가 '저 사람들 하나하나에도 다 각각의 사연이 있겠지?'라는 깨달음이 이 연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전철 안에서 하늘 사진을 찍던 그에게 "예술하시나 봐요? 예술 오래오래 해주세요."라고 했던 어떤 분의 느닷없는 다정함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흔히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 내 코가 석 자라 타인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세상이다. 신 작가는 이러한 자발적 고립들이 현대인의 경계와 적대를 가속화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런 세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타인을 궁금해하는 '윤숙'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결혼을 포기하고 포토그래퍼 친구 윤과 함께 호텔에 투숙해 '싱글 웨딩' 사진을 찍는 김도 등장시킨다.
윤숙 역의 백현주 배우는 '대체불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인공 윤숙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다. 사람이 계속 달리기만 하면 지쳐서 못 사는데 이젠 끝이 좀 보이는 것 같아서 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엔 평화와 여유가 깃든다. 반면 교회 부흥회 리플릿을 호텔 카운터에 좀 놓고 가겠다며 사망한 자신의 딸이 천국에 갈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조르던 류경인 배우에게 "딸이 꿈에 나타나요?"라고 묻는 윤숙의 질문에 "아니요. 안 나타나요!"라며 눈물을 터뜨릴 땐 나도 눈물이 나서 혼났다.
오늘 연극은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 멤버 두 명과 함께 보았다. 한 분이 쓰고 있는 원고의 주제와도 통하는 바가 있어서 윤혜자가 함께 보자고 권했는데 흔쾌히 동의해서 단체 관람이 성사된 것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운 좋게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할 수 있었다. 구술생애사인 최현숙 작가 사회로 신효진 작가, 이래은 연출, 백현주 배우가 나왔다. 신효진 작가는 '객쩍은 대화로 서로 연결되는 걸 해보고 싶었다'면서 지하철 같은 데서 쉽게 말을 거는 할머니들 얘기를 했다. 인생의 대부분은 중요한 메시지보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지고 그런 무해한 관심이 호명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셀린송이 극본을 쓴 연극 《엔들링스》로 만나기도 했던 이래은 연출은 '호텔 로비에서 밝혀지는 사람들의 사연들은 모두 사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다고 말했다. 단체 카톡방에 아내 윤혜자가 올린 '후반부 등장인물들이 실존인 듯 유령인 듯 표현한 이유를 묻는 질문엔 '삶과 죽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번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배우 지망생 여학생의 리뷰와 질문에 찬찬히 대답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무도 제목 얘기를 안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우선 연극을 너무 잘 봤다고 인사를 하고 "'무화과는 열매 없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 자체가 꽃’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소설을 끝내지 못하는 윤숙 역시 무화과처럼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라고 했더니 신효진 작가가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시다'라고 동의를 해줘서 기뻤다. '꽃을 피우지 못해도 그대가 이미 꽃'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는 관객과의 대화였다.
밖으로 나와 무례한 중년남자 역을 맡았던 남동진 배우와 인사를 나누고 기념 촬영을 했다. 남 배우가 신효진 작가와 이래은 연출을 소개해 줘서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내가 이래은 연출에게 "저희는 연극을 좋아하는 윤혜자·편성준 부부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아내가 창피하다고 중얼거리며 내 손을 잡고 극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연극을 다 보고 나면 쓸쓸한 호텔 로비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사소한 관심과 오지랖'에 내 가슴도 뜨거워지는 좋은 연극이다. 할 수 있다면 놓치지 말고 보시기 바란다. 2025년 11월 11일까지 정동세실극장에서 공연한다.
● 극작 : 신효진
● 연출 : 이래은
● 출연 : 백현주 경지은 김의태 남동진 류경인 백소정 송민규 양대은 이미라
● 기획 : 김민솔
● 무대감독 : 박진아
● 액팅코칭 : 장재키
● 주최주관 : 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