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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서러움 속에도 희망은 있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용길이네 곱창집》

by 편성준

지드래곤(G-Dragon)은 한글 이름 지용을 영어로 바꾼 것이다. 똑같은 작명법을 사용한 연극을 어제 보았다. 정의신 작가가 쓰고 연출한 '야끼니꾸 드래곤'이다.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 한쪽 팔을 잃고 전 재산을 실어 보낸 선박은 침몰을 당했으며 제주도에 살던 가족들은 4.3 때 모두 죽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된 용길은 두 번째 부인 영순과 세 딸, 그리고 아들 하나와 함께 ‘야끼니꾸 드래곤’(용길이네 곱창집)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곱창 굽는 냄새가 객석까지 밀려오는 오프닝 씬 뒤 함석지붕 위에 오른 소년은 외친다. 나는 이 동네가 싫어요.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거나 싸우고, 여자들은 수돗가에 모여 남편 흉이나 보는 동네. 비가 오면 똥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동네. 소년은 용길과 영순이 낳은 막내아들인데 자폐아인지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한다.


한국어와 일본어 대사가 번갈아 흘러나오는 이 연극은 오갈 데 없는 자이니치들이 1970년 경 오사카 근교 곱창집이라는 공간에 모여 작은 소동과 애정행각을 벌이는 줄거리다. 예쁘지만 다리를 저는 첫째 딸 시즈카는 둘째 딸 리카와 결혼한 테츠오와 관계가 묘하고 둘째는 무능한 남편에 질려 가게에 찾아온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셋째 딸 미카는 한 술 더 떠서 클럽에서 자신을 돌봐주는 유부남과 사귄다. 겉으로만 봐서는 온 집안이 다 콩가루 분위기인데, 여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일본에 살지만 온갖 멸시와 차별을 받는 자이니치들은 일본인들과 섞일 수 없으니 그들이 속한 좁은 자장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곱창집 단골인 남자들이 장기를 두다가도 용순이나 미카가 장기말들을 화라락 뒤집어버려도 "에이~!" 하고는 당해버리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슬픈 이야기인데도 그 속에 끈끈한 유머가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것은 왁자지껄한 일본 대중극 분위기에 정의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진정성 있게 얹혀서일 것이다. 이들의 삶은 왜 이리도 서럽고 고달픈가. 용길은 그게 우리들의 운명이요 팔자인가 보다 하고 포기하다가도 집을 떠나는 자식들만큼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란다. 지붕 위에 올라가 놀던 막내는 죽고 가게가 헐리는 우여곡절 끝에 자식들은 모두 집을 떠난다. 지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북송선을 타는 테츠오와 시즈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막내의 영혼인지 함석지붕 위에 오른 소년은 처음처럼 "나는 이 동네가 싫었어요......"라고 외치다가 끝내 그래도 난 이 동네를 좋아했어요, 라고 외치며 주저앉는다. 흩날리는 분홍 벚꽃들 속에서 흐느끼는 관객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2008년 한일 합작으로 초연되었을 때 고수희 배우가 참여했던 이 작품은 2011년 한국 공연 후 14년 만에 2025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 연극으로 다시 막을 올렸다. 고수희는 이 연극을 계기로 일본어를 배우더니 결국 극단 '58번국도'를 만들어 새로운 일본 연극들을 발굴해 올리는 극단 대표가 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뜻깊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와 아내는 58번국도의 작품을 여러 편 보았는데 하나 같이 작고 아름다운 극본과 연기가 어우러진 좋은 연극이었다. 공연 시간이 자그마치 185분이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마지막엔 어김없이 눈물이 터졌다. 우리는 이렇게 꽉 찬 이야기 속에 웃음과 눈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극장을 찾는 게 아닐까. 11월 23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어제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올렸더니 그걸 보고 예매했다는 분도 있다. 당신도 놓치지 마시라.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연극이 될 것이다.

● 작·연출 : 정의선 작 연출 ● 출연 : 이영석 고수희 박수영 김문식 정수연 치바 테츠야 무라카와 에리 지순 사투라이 아키요시 박승철 최재철 기타노 히데키 마츠나가 레이코

● 극장 :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 공연 기간 : 2025.11.14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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