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거창하지만 소소한 이야기
아침에 장석주 선생의 『교양의 쓸모』 중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서>라는 꼭지를 읽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 파주에 사는 장 시인은 새벽에 거실로 나왔다가 창밖에서 전나무 가지와 이웃집 지붕 등에 첫눈으로 내리는 폭설이 소복하게 쌓이는 걸 보고 놀란다. 저 큰 눈송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세상은 이토록 고요하구나, 하면서 감탄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고요는 생각의 묘판(苗板)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고요라는 묘판에 생각의 씨앗들을 파종해 싹을 틔우는 것이다. 그는 생각해 보니 언제나 고요 속에서 글쓰기를 해왔다고 했다. 고요는 몰입의 조건이다. 그래서 고요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유의 능동을 일으키는 활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무지라는 관념으로 이어져 '책을 많이 읽었다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까지 불러온다. 선불교의 선사(禪師)(선이 고요할 선 자였구나!)들은 우리 안의 무지를 깨운다. '고상한 물음에 동문서답하기'의 예로 장 시인이 든 "달마 조사가 동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했다는 에피소드의 배경을 더 알고 싶어진 나는 챗GPT에게 그 일화의 배경을 물으려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그만 페이스북 아이콘을 잠깐 누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순간 아침 고요는 깨진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찾은 어떤 시인의 새 시집 이야기를 읽고 시집의 목차를 보니 2부 제목이 '조리 부조리 비조리 간편조리'다. 이거 너무 재밌지 않은가. 게다가 시 제목들도 '현대시작법'이나 '신파소설' '민음사 세계문학전지' 치킨 런' '북토크' '장르' '작가' '소설가' 등 문학 전반에 대한 개념들을 겁내지 않고 팍팍 쓰고 있다. 시인의 이름은 기혁이고 시집 제목은 『소설책』이다. 알라딘에 들어가 살펴보니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는 말을 고르시오』 『소피아 로렌의 시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등 제목만 읽어봐도 흥미가 돋는 시집들을 냈다. 이런 시인의 존재를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시집을 사려던 손은 멈칫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니 택배 회사가 바쁠 테고 또 지금 보령소행성으로 오고 있을 부희령 작가의 새 소설집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부터 읽자, 시집은 서울 가서 직접 사자, 라고 생각을 바꾼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반이다. 그다음에 진짜 바보 같은 짓을 한다. 스마트폰 안 서점을 나오다가 마침 7시 5분이 됐길래 유튜브로 《겸손은 힘들다》 채널에 들어간 것이다. 레스토랑 차리는 일 때문에 파리로 출장 간 김어준 대신 일일 진행자로 나선 주진우가 김건희·윤석열 부부와의 관계를 무기로 온갖 비리와 전횡을 저지른 전성배에게 특검이 겨우 5년밖에 구형을 하지 않았다고 흥분하고 있었다(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죄가 무겁다).
무속인 전성배는 유명 연예인들이 특히 좋아했다는데 워낙 주가가 올라가 한때는 그를 만나는 데만 1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건 다 김건희와의 끈이 시중에 소문나서 그런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들으며 마음이 급격하게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정치 관련 유튜브를 시청하면 정서가 황폐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던 주진우는 뉴스 브리핑 끝날 때쯤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공장장은 말하는 도중에 자꾸 끊잖아요?"라며 최 PD와 김어준 사이 이간질을 시도했으나 그녀는 '공장장이 곧 돌아오신다'라면서 말려들지 않고 "겸손은 힘들다, 최서영이었습니다."라는 멘트를 혼자 하고는 스튜디오를 나갔다.
오늘은 서울로 올라가 연극을 보고, 크리스마스 아침엔 오랜만에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저녁엔 배우 이승연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고, 다음 날 자동차를 A/S 센터에 맡긴 뒤 아내와 함께 보령으로 내려올 생각이다. 오늘 아침 서울에 있는 아내가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나 했더니 파주에 있는 명필름 아트센터에 볼 일본 영화 《해피엔드》를 예매하고 있었다. '삼묘상상' 을 중심으로 친하게 지내는 작가, 평론가 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해피엔드 재밌다던데, 극장에서 보고 싶은데..."라는 글을 단톡방에 올렸고 김혜선 작가가 받아 "그거 빨리 예매해야 할 거예요. 심지어 명필름아트센터가 돌비 애트모스라..."라고 불을 질렀고, 그걸 놓치지 않은 아내 윤혜자가 전광석화처럼 1월 중순 영화표 여섯 장 예매를 했던 것이다. 나는 톡방에 "아내지만 멋짐.'이라는 댓글을 썼다. 다들 속으로 재수 없는 놈이라 생각했겠지만 어쩌겠나. 내 마음의 고요는 이미 깨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