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결심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며 했던 생각들

by 편성준


어제저녁 서울로 올라와 경복궁역 출판사 사무실에서 책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금월당에 들어와 잤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주로 있는 집이라 금월당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젠 아무 요일이나 와서 잔다. 자기 전 집에 있는 책 중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를 꺼내 연필로 줄을 치며 읽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감탄하며 읽었던 책을 이제야 읽는다. 책갈피 사이에 꽂혀 있는 영수증을 보니 2024년 12월 9일 한평책방에서 김미옥 선생과 합동 북토크 하던 날 김수나 대표에게서 산 책이다. 기억이 난다. 백인들이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시인 캐시 박 홍의 자전적 에세이이자 문명비평서인 이 책을 나는 오래전부터 읽고 싶어 했는데, 왜 이제야 책장을 열게 된 것일까.


첫 장인 '유나이티드'를 읽다가 꼭지 뒤쪽에 있는 데이비드 다오의 에피소드(2017년 4월 비행기 수용 인원이 초과되자 자발적으로 양보할 승객을 찾다가 무작위로 베트남계 미국인인 다오를 지목했으나 그가 거부하자 승무원들이 강제로 끌어낸 사건)에서 저자가 미국의 건국이념과 항공사 이름을 중의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고 감탄했다. 내가 글쓰기 강의할 때 자주 예로 드는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탁월하게 사용한 문단(만약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 나라에서는 오로지 백인들만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대다수의 비백인은 과거로 돌아갔다가는 노예가 되거나, 살해되거나, 신체에 상해를 당하거나, 흉포한 아이들에게 쫓길 것이기 때문에)은 이미 옥타비아 버틀러의 SF 『킨』에서 현실처럼 그려진 적이 있다는 것도 순식간에 떠올랐다.


이 책은 좀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러나 책을 천천히 읽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다. 난 왜 이리 바쁜가. 사실은 마음이 바쁠 뿐이다. 요한 하리는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속도를 늦추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잠을 더 자면 된다'라고 했는데 스마트폰과 AI 시대엔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사놓고 읽지 않는 책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동시에 서점 매대에 누워 있을 내가 모르는 새 책들을 상상했다.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의 '베스트 텐'을 꼽아보는 요즘 나는 일 년 동안 읽은 책도 본 영화도 별로 없다는 사실에 심한 부끄러움과 절망감도 느꼈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올해의 베스트 텐은 생략하자. 내년에는 올해 못 쓴 책을 한 권 쓰고, 아니 두 권 쓰고, 천천히 내 속도로 책을 읽고 리뷰를 쓰자(이러면서 나는 내년엔 『마이너 필링스』를 마저 다 읽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결국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그게 한 줌의 지식이고 보잘것없는 통찰이라도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다. 쓰다 보니 우는 소리가 됐다. 잠을 더 자야 하는데. 내년엔 잠을 잘 자는 것도 목표에 넣자. 이제 올해가 이틀 남았다. 이틀을 잘 보내자. 내년엔 좋은 일이 또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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