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꾸는 코드에 대하여
어디서 태어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니 국가나 가족 구성원은 운명처럼 주어지는 관계지만 친구나 주변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문득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 삶의 반경이라는 게 뻔하지 않은가. 어느 날 벼락 맞은 듯 다른 삶으로의 의지가 불타올라 홀로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거나 중남미로 날아가 새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비슷한 학교와 직장과 연고지를 중심으로 알게 된 몇몇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갈 뿐이다.
요즘 내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중·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은 어쩌다 한 번 생사 확인 차원에서 안부를 나누는 정도이고 20여 년 간 광고계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과도 이제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대신 시나 소설, 에세이를 쓰는 작가들과 부쩍 친해졌고 관공서나 지차체의 문화 기획 관계자들과 자주 만난다. 요리나 식재료에 관심이 많은 아내 덕분에 음식의 고수들과 안면을 트고 음악·미술 등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 역시 다 우연에 의한 것이다. 어떤 우연이냐 하면, 누군가 전에 내가 쓴 책을 읽고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우연히 나를 소개받아 반가워하는 경우도 있고 오래전부터 기획자인 아내의 친구였는데 그 남편이 나라는 걸 뒤늦게 알고 웃는 사람도 있는 식이다. 다 우연이지만 거기엔 어떤 '코드'가 숨어 있다. 나는 그 코드가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섯 권의 책을 쓰면서 가까워진 사람도 있고 글쓰기나 책 쓰기 강연 등으로 만나 새롭게 서로의 주소록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사람도 있다. 개중에는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멀어진 사람도 있다.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를 끊거나 나를 차단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기에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냉철함보다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격언을 더 믿는 편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가족이 아니더라도 내 곁에 오는 사람들은 다 우연에 의해서 만난다. 그 우연이 '같은 장소를 갔던 기억'일 수도 있고 '같은 책이나 영화, 사람을 유난히 좋아하는 취향'일 수도 있다. 어떤 코드라도 좋다. 다만 나와 꼭 맞는 친구를 고르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나와 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성적 취향이 정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자. 굳이 그걸 들춰내서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은 접어두자. 사람은 다 백인백색이다. 그러고 보니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도 타인이 본질적으로 악마라고 규정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 속에서 내가 ‘대상’으로 굳어질 때 생기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타인의 가능성은 열어두되 내가 추구하는 의지를 꾸준히 밀고 나갈 때 우연은 비로소 '데스티니'가 된다(이럴 땐 체념에 가까운 한자어 '運命'보다는 소명이나 내가 가야 할 자리, 를 뜻하는 'Destiny'를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