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정·오효정의 『명랑한 유언』
부산의 독립서점 주책공사의 이성갑 대표는 2024년 '올해의 책'을 뽑으며 구민정·오효정의 『명랑한 유언』(스위밍꿀)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작은 서점에서 뽑은 거니 무시하면 그만이겠으나 이 대표가 왜 이 책을 대상으로 뽑았는지 궁금해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던 구민정은 체육인 집안에서 태어난 딸답게 육사에 수석 입학했으나 도저히 군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입학을 취소하고 다른 대학에 들어가 방송국 PD의 꿈을 꾸다가 공채를 통해 방송국 PD가 되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오효정은 이름에 '조용히 효도하라'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고,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예술대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꾀죄죄한' 팀원들과 찍은 졸업작품이 무려 4관왕을 차지하는 바람에 졸지에 종편에 픽업되어 방송 일을 시작했다. 가난에 시달렸던 오효정은 프리랜서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불어나는 통장의 잔고를 보며 흐뭇해했다. 자신의 건강이 땅밑으로 꺼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1박 2일》이나 《히든 싱어》 같은 유명 프로그램 조연출을 거치며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전무후무한 다큐라는 평을 받은 《지구 위 블랙박스》의 공동연출로 만나 서로 '대체 불가능'한 친구 겸 동료가 되었다. 기획력이 좋은 구민정과 남다른 실행력과 섭외력, 소통 능력까지 겸비한 오효정은 환상의 콤비였다. 오효정이 위암 4기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변에서 암에 걸린 또래를 못 보았기에 구민정은 이게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악몽을 받아들이기엔 두 사람 너무 젊은 나이였으니까.
이후로는 안타까운 암과의 싸움 이야기다. 암 판정 직후 응급실에서 주춤주춤 커튼 밑으로 가까워지던 엄마의 발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오효정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뿌려야 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도 매대의 비닐봉지를 뜯어 토하던 오효정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화로 듣는 장면에서도 울었다. 울면서도 '요즘 PD들은 글쓰기 시험도 보나?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라며 감탄하는 내가 약간 한심했다.
오효정은 갔지만 그가 쓴 글들은 남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나는 오효정이 죽고 나서 '여자 축구 클럽'을 찾아내 축구를 하며 '축구는 원초적 스포츠다. 달리고, 차고 수시로 몸을 부딪히는 동안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쓰는 구민정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 클럽에서 만난 언니가 전해준 진은영의 시집에서 「그날 이후」라는 시를 읽고 울음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그 시를 다시 찾아보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예은이가 불러주고 진은영 시인이 받아 쓴 글'이라고 알려졌던, 정혜신 선생과 김민정 시인이 생각나는, 이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은 나 역시 또 눈물을 떨구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슬픔보다는 뭔가 정화가 된 눈물이었다.
이 책에 슬픈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일로 만나 친구가 되었던 SF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천선란 작가와 옆 단지에 산다는 인연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드라마 기획 회의를 계속하는 장면은 신기하고도 즐거웠다. 축구팀 언니들을 데리고 2박 3일 캠핑을 가서 술꾼부터 '알쓰'까지 웬일인지 죄다 술을 술술 마시고 '별멍'과 '불멍'을 거듭하는 이야기도 좋았고 텐트 안에서 최진영 작가의 『쓰게 될 것』을 읽는 민아 언니도 좋았다. 그중에 제일 좋았던 건 불면증 때문에 매일 새벽에 혼자 깨 넷플릭스를 본다던 민정 언니가 캠핑하는 며칠 동안 제일 먼저 잠들어 오전 일곱 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심지어 낮잠도 자고 차 안에서도 금방 잠이 들어 '허언증이 아니냐?'는 놀림을 받았다는 대목이었다. 나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마음이 짠해졌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민정 언니처럼 불안하고 쫓기는 삶에 익숙한 것이다. 구민정과 오효정의 삶 역시 그랬다. 세상을 떠난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이 같이 쓴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게 한다. 질문이 너무 크기에 얼른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방금 읽었기에 희미하게나마 방향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신이 꼽은 손가락 마디 어디엔가에 보물처럼 숨겨 놨을 것이다. 강추한다. 늦게라도 꼭 읽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