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송승환의 《더 드레서》
연극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상은 없어지고 오로지 무대와 객석만 남는다는 것이다. 거기서 느껴지는 이상한 평온함이 연극 팬들을 다시금 극장으로 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안에서 연극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독일군의 폭격이 계속되던 1942년 런던에서 셰익스피어 극을 올리는 극단과 거기 모인 관객들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박근형과 송승환 콤비가 주연을 맡은 연극 《더 드레서》를 보았다. 20세기 후반 최고의 연극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로널드 하우드 극본의 이 연극은 박근형과 송승환 두 배우 때문에라도 놓칠 수가 없었다. 작년에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보여준 박근형의 완벽한 딕션과 몸짓은 '무릇 선배라면 저래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연습 부족으로 대사를 틀리거나 타성에 젖은 연기를 일삼던 원로배우들을 많이 보아 온 터라 박근형의 성실함은 더욱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이래로 늘 나를 감탄시켰던 송승환의 연기가 궁금했다. 망막색소변성증과 황반변성으로 인해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았으며, 30cm 정도 앞에 있는 물체 정도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지만 "무대 위 동선을 모두 외워 상관없다"라는 그의 말에 전율했다. '무릇 배우라면 저래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서'란 연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에게 옷을 입혀주고 분장도 해주는 등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노먼은 30여 년 전 선생님(Sir)과 인연을 맺은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와 함께 해왔다. 당연히 셰익스피어 연극의 모든 대사와 진행 과정을 줄줄 꿴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가끔 치매 증상을 보이는 선생님은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에 분장실에 앉아 '리어 왕'의 첫 대사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 노먼은 가슴이 타들어 갈 지경이다. 오랜 세월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과 함께 해 온 노먼도 어느덧 예술가의 마음으로 살게 된 것이다. 불안해서 공연을 취소하고 은퇴를 발표하라는 사모님의 냉정한 권유에 선생님보다 노먼이 더 펄펄 뛰는 이유가 바로 그 증거다. 아슬아슬한 선생님의 컨디션을 되돌리고 겨우 무대로 올려 보내는 백스테이지의 상황은 웬만한 스릴러 드라마를 뺨칠 정도로 긴박하다.
두 주연배우 말고도 사모님 역을 맡은 송옥숙과 코믹 연기가 일품인 유병훈 배우의 얼굴도 반가웠다. 맷지 역의 이주원과 옥슨비로 열연한 임영우 역시 선배들의 노력에 흠집을 만들지 않으려는 각오가 돋보였다. 한참을 웃고 가슴 졸이고 하다가 공연이 모두 끝나고 선생님이 세상을 버리는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고 선생님의 자서전 원고를 살피던 노먼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걸 알고 격분하는 장면에서는 허탈함도 느껴졌다. 노먼(Norman) 은 '북쪽 사람'이라는 뜻의 게르만어에서 유래했지만 이 장면에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름 노맨(No man)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도 선생이 죽기 전 노처녀인 맷지가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짝사랑해 왔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커튼콜에 송승환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올 때 감동했다. 이 작품은 로널드 하우드의 더 드레서이기도 하고 장유정 연출의 더 드레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박근형·송승환의 더 드레서라고 하고 싶다. 배우는 늘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존재라고들 하지만 이 정도의 연기와 포스라면 오히려 세상이 그들에게 선택받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멋진 두 배우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