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의 『연애 소설이 나에게』
EBS에서 교양 PD로 일하고 있는 오정호는 원래 '야한 소설이 나에게'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 근엄한 독자들의 항의 전화를 받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출판사 대표의 권유를 받아들여 연애 소설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된 일이다. 사실 야한 소설보다 연애 소설이 더 가슴 뛰는 순간이 많으니까.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긴 나사못을 조심스럽게 돌리듯 은밀하게 그 뜨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스무 살 무렵의 오정호에게 "망치로 못대가리를 때리는 용기를 가진 자에게만 승리가 주어진다"라고 외치던 친구들의 조언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책에는 롤랑 바르트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다니자키 준이치로, 필립 로스, 존 윌리엄스, 줄리언 반스, 앤드루 포터, 박범신, 정영수, 이혁진 들의 소설이 등장한다. 그런데 존 파울스나 이디스 워튼, 알베르 카뮈의 소설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연애소설은 핑계이고 연애의 본질과 연애 소설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본격 에세이라는 생각고 든다. 당연히 소재보다 깊고 진한 글들이 나온다. 저자의 애독서 리스트를 나의 목록들과 비교해 가며 읽는 건 보너스로 주어지는 쾌감이다.
오정호 저자는 소설 한 편 한 편을 열거하는 대신 연애가 싹트는 순간부터 파멸과 구원을 얻는 순간까지 플롯을 만들어 자신의 취향을 맘껏 과시하면서도 작품 보는 눈이 정확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의 국내 번역본 띠지에 '가장 빛나고, 품격 있는 연애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자신은 이 작품이 한 편의 코미디가 아닐까 하는 못된 생각도 든다, 라고 쓴 부분에서 전격 동의했다. 도대체 첫날밤 성관계를 실패하고 결국 헤어지는 어리숙한 남녀 이야기가 어떻게 연애 소설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몽스북의 '~가 나에게' 시리즈는 저자가 푹 빠져 지냈던 어떤 것에 대해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뒤집어 얘기하면 읽는 사람에게 비슷한 감각을 선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의 글을 읽으며 나는 뭘 탐닉하는 인간이었는지, 나의 행복은 어디에 기준점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플롯이라는 영어 단어엔 이야기 구조와 음모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핸디한 사이즈지만 많은 이야기와 정보가 들어 있는 책이니 다들 한 권씩 구입해 두 번씩 읽으시기 바란다. 나에게는 시리즈 중 가장 '취향 저격'의 작품이었다. 칼럼을 연재하는 《기획회의》에 좀 더 긴 독후감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