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빈의 《방랑자》
아내는 《고요한, 미행》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극이 너무 좋은 데다가 극본을 쓴 작가가 서른 살도 안 된 젊은 배우였기 때문이다. 홍사빈은 배우이자 작가이고 연출도 잘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형 인간이다. 얼마 전 청룡영화제에서 신인상도 받았다. 어제 그가 쓰고 연출한 연극 《방랑자》를 보기 위해 보령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와 국립정동극장 세실로 갔다. 연극은 시작부터 친절했다. 두 명의 배우가 나와 시작을 알리기도 하고 재미있는 동작과 표정으로 등장인물을 소개하기도 했다. 마치 연극 개론 첫 시간처럼.
작은 상자 속에 넣어진 채로 극장 앞에 버려진 영은 극장 사람들의 손에서 자라 어른이 된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연기에 소질이 없어 배우들에게 대사를 불러주는 ’프롬프터‘로 극장에서 일한다. 당연히 모든 연극의 대사를 다 외운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다. 군대에 징집된 영은 장교로부터 반란군 색출 작업을 명령받는다. 어느 시골 마을에 도착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무의 수첩 덕분에 졸지에 마을 연극 ’방랑자‘의 총책임자가 된다. 친구였던 무는 죽었는데도 영에게 나타나 말동무가 되고 의논 상대가 되어준다. 아마도 영의 또 다른 자아쯤 되는 것 같다. 장교는 ”최소한 다섯 명은 색출해서 보고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와 채근하지만 영은 그럴 생각이 없다.
대신 그는 처음 만났을 때 장총을 사납게 들이대며 의심하던 류에게 연극 대사를 말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다른 주민들에게는 연출하는 방법, 소품 준비하는 방법 등을 가르친다. 주민들 역시 전쟁통에 다쳐 다리를 절거나 죽은 아이를 잊지 못하거나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등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외지인 장도 마을로 들어와 그를 돕는데 알고 보니 그도 장교가 보내온 스파이였다. 스파이 치고는 연극을 너무 잘해서 물어보니 예전에 영이 대타로 무대에 설 뻔했을 때 나타나 배우 자리를 차지했던 그 사람이었다.
영은 그렇게 감시자이자 기획자로서 무대 밖에 서서 연극이 가진 치유와 기억의 힘을 풀어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전쟁 중에도 마을에서 하나의 공연을 올리기까지 여러 사람의 마음과 노력을 모으는 과정은 그대로 홍사빈이 생각하는 연극의 본질과 연결된다. 죽은 무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과장된 대사와 표정도 연극이기에 모두 가능하다. 극이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홍사빈 연출은 ”당분간 연극 연출을 멈출 계획이기에 이번엔 최대한 연극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 역할을 맡은 이호 배우가 너무 자연스럽게 물구나무서기를 하기에 놀랐는데 현대무용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호뿐 아니라 장 역할의 오원권 등 배우들의 움직임이 매우 좋았는데 이는 ’움직임 감독‘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6.25나 월남전 등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이 존재하는데 어느 전쟁인지 밝히지 않고 시대도 특정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고 홍사빈 연출은 ’어떤 시대나 공간에 갇히지 않게 하고 싶어서‘라는 답을 주었다. 아내는 홍사빈 연출의 연극에서는 늘 커튼콜 때 모든 배우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홍사빈의 인장이냐고 묻자 ’조씨고아 때부터 해오던 인사였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다. 홍사빈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 나왔던 배우이기도 하다.
연극을 보기 전 로비에서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 씨와 이 연극의 더블캐스팅 배우인 최이레 배우를 만나기도 했다. 요조 씨는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했는데 곧 송은이 씨를 비롯한 친구들이 와서 인사를 나누었고 그들 덕분에 홍사빈 작가 겸 연출에게도 인사를 하는 행운을 누렸다. 흰색 비니를 쓰고 엷은 미소를 짓는 홍사빈은 정말 천재다. 연극을 사랑하는 천재가 쓴 연극론인 이 연극을 놓치지 마시라. 2월 13일까지 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한다.
- 극작 : 홍사빈
- 연출: 홍사빈·김희경
- 출연 : 권용찬 지민제 최이레 최윤서 이호 오원권 권윤영 정예지 서동재 김미서 장신희
- 공동주최 : 국립정동극장(대표 정성숙)·한양레퍼토리컴퍼니(대표 조한준)·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