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보허자》 리뷰
허공을 걷는 자(步虛子)라니, 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무한 이야기인가. 원래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궁중음악 중 하나를 일컫는 용어라지만 배삼식 작가에게는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적 사건 뒤에 남은 사람들을 표현하는 데 적격인 글자로 보였을 것이다. ’ 전통적 플롯에서 일부러 비켜가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배삼식은 이번 작품 역시 정치사 자체보다는 계유정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꿈의 흔적(몽유도원도)’과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과 화해를 그 시작점으로 잡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수양대군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안평의 딸 무심(無心)과 몽유도원도를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진흙탕 같은 현실과 몸은 흩어져 흔적도 없지만, 어느 젊은 시절의 봄날 안평이 꾼 꿈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라는 아이러니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했다(무등일보 인터뷰).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 정국 겸 가족 살육극을 거친 뒤 산 자와 죽은 자가 화해를 넘어 ’ 이해‘를 하려면 30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27년 간 종으로 떠돌던 안평의 딸 무심이 면천된 그해 봄, 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어 옛집 수성궁터를 찾아왔을 것이라는 상상이 이 창극의 시작이다.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듯 분분이 흩날리는 꽃잎 아래 폐허에서 안평을 사랑했거나 안평의 몰락으로 각자의 삶이 무참히 꺾인 사람들—무심, 안견, 대어향—이 다시 마주치고 마침 거기에 나그네로 변장한 안평과 안평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 같은 존재 ’수양‘이 겹친다.
배삼식의 작품 세계가 역사적 사건보다 그 주변부 인물과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오래 응시하며 세공된 언어들을 흩뿌리는 예술가의 면모라면, 김정 연출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의 무너진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그리고 허공을 걷듯 쓸쓸하게 이승을 떠돌던 존재들을 어떻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떠나보낼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둔다. 텅 빈 듯하면서도 꽉 찬 무대와 앙상블의 웅장한 찬가는 그런 연출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동생을 죽인 형과 형에게 죽은 동생이 산돌매나무꽃이 피어난 절터에서 마지막으로 서로를 부여잡았을 때 수양이 하는 ”나는 여덟 살, 용이 너는 일곱 살. 그때 거기엔 산돌나무꽃이 온통 하얗게 구름처럼 피어 있었지. 우리는 이 석탑 옆에 서서 산돌나무꽃을 한없이 바라보았다...“라는 대사는 그간 쌓인 원망과 섭섭함을 털어버리는 셀프 애도의 순간을 만든다. 음악과 언어가 어우러지는 창극이라 가능한 따듯한 비극이다.
안평 역을 맡은 김준수의 연기와 소리는 그가 현재 테크닉과 예술성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안견 역의 유태평양은 여전히 듬직한 무게감을 뽐낸다. 무심 역을 맡은 민은경은 작은 체구라 처연한 무심 역에 더 어울리는 듯했고 이광복과 이소연 커플의 안정감도 무대 아래 관객들에겐 더할 수 없는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앞으로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한 무대에 서는 걸 다시 볼 수 있을까?“ 극을 같이 본 아내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 다 국립국악단을 나와 새로운 삶을 꾸리게 되었기에 하는 얘기다. 그래도 오늘의 무대는 쉬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김정 연출과 잠깐 카톡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 새 작품 준비하느라 남원에 있다고 하면서 ’보허자를 매일 못 보는 게 한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만큼 애정이 많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2026년 3월 29일까지 공연하니 지금 티켓팅에 도전하시라. 안 보면 손해인 공연이니까.
극본 : 배삼식
연출 : 김정
작창 : 한승석 장서윤
작곡 : 권령은
안무 : 이태섭
의상 : 윤은선
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
주최 : 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