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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6. 2019

제주 이틀째

아내 없이 혼자 제주 한 달 살기 2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만 보면
아무 걱정이 없는
놈으로 보일까 봐
걱정이다

'공처가의 캘리'를 통해 제주에서 혼자 한 달 살 생각이라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에 올렸더니 부럽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다. 하긴 나라도 다른 놈이 그런 글을 올렸다면 부럽다 부러워, 저놈은 팔자도 좋지...라는 소리를 연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나는 좀 무덤덤하다. 제주도라지만 여긴 중산간이라 밤낮으로 파도가 철썩이는 것도 아니고 마당에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휘휘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버는 게 없으니 생활비도 아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여기 오면 누워서 책이나 잔뜩 읽어야지 했는데 오자마자 '급하게 수정을 해야 한다'는 클라이언트의 전화 한 통에 부엌 식탁에 앉아 꼬박 일만 하고 있었으니. 공기가 희박한 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이 부럽겠지만 정작 자유롭게 숨을 쉬며 걸어가는 사람도 과중한 업무나 빚 때문에 얼굴이 노래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 와중에 인터넷까지 말썽을 부렸다.

어제는 계속 일과 인터넷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원고 수정을 급하게 해야 하는데 수정을 위해 자료를 찾으려면 인터넷이 필수다. 그런데 잘 되던 휴대폰 테더링(개인용 핫스팟)이 갑자기 먹통이 된 것이다. 너무 다급해 페이스북 담벼락에 ‘왜 테더링이 안 될까요’라고 올렸더니 그걸 보고 별장 주인장께서 카톡으로 옆집 와이파이 번호를 보내줬다. 옆집이 부모님의 지인이라 비번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환호작약하며 당장 와이파이를 찾아 연결했다. 그러나 연결할 수 없다는 말이 뜬다. 아, 얘 도 대체 왜 이래...? 나는 혹시나 하고 노트북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기적적으로 와이파이가 연결되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빨리 원고를 마감해서 인터넷이 끊어지기 전에 이메일로 보내고 싶어서였다. 별장 주인장도 궁금했던지 와이파이 잘 되느냐고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왔다(나의 안부가 아니라 와이파이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안 되다가 이층으로 올라왔더니 잘 된다고 자랑을 했고 주인장께서는 웃으며(카톡으로 'ㅎㅎㅎ' 하고 웃었다) "옆집 공유기가 2층에 있거든요. 약하게라도 잡히면 다행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인터넷은 계속 꺼졌다켜졌다를 반복하며 나의 속을 썩였다. 밤까지 다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결국 다음날로 넘긴 나는 인터넷 때문에 하도 신경을 써서 그런지 아내와 통화를 한 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새벽에 괜히 눈이 떠져 집안을 한참 돌아다니고 가져온 책도 읽고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에 댓글도 달고 하다가 불현듯 샤워를 하고 캐비초크(아내와 내가 요즘 아침 식사로 타 먹는 식품이다. 몸에 좋은 야채 성분이 든 분말형태의 영양식인데 아내는 이걸 장복하면 간이 좋아지는지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날 힘이 들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고 투덜댄다)를 한 컵 타 먹었다. 그리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켜보니 옆집 와이파이가 순순히 잡히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노트북이 놓여있던 이층의 옹색한 탁자 앞에 그대로 앉아 문서 작업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 원고를 거의 다 완성했을 때 갑자기 와이파이가 또 먹통이 되는 것이었다. 역시 옆집 신호가 너무 약한 것 같았다. 휴대폰 테더링은 이제 연결을 표시하는 페이지조차 뜨질 않는다. 아, 이게 무슨 양수겸장 수난이란 말인가. 실의에 젖은 나는 한숨을 계속 쉬며 네트워크 인터넷 설정 버튼만 기계적으로 계속 고쳐 누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다시 기적처럼 와이파이 신호가 잡혔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원고를 첨부해 송고했다. 문서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스릴을 느껴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오후에는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가 어느 카페에 가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몬] 중 <마죽>과 <덤불 속>이라는 소설을 다시 천천히 읽었다. <덤불 속>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영화 [라쇼몬]의 원작이 되는 단편소설인데 다시 읽어도 역시 절묘하다. 산에서 만난 무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도둑이 서로 내가 무사를 죽였다고(심지어 무사는 자신이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고) 엇갈린 주장을 벌이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죽은 무사는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무당의 입을 빌어 증언을 한다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이름난 도둑이자 강도인 다조마루의 대사는 현대극으로 치환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신랄하다.


"뭐, 사내를 죽이는 것쯤이야,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여자를 빼앗게 되면 반드시 저 사내는 죽는 거거든요. 다만 나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을 쓰지만 당신은 칼을 쓰지 않고 그저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여차하면 위해주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죠. 그러면 피는 흐르지 않고. 사내는 멀쩡하게 살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죽인 겁니다. 죄의 깊이를 생각해 보면 당신들이 더 나쁜지 내가 더 나쁜지,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 수 없지요.(비웃는 듯한 웃음.)"

마치 요즘 검찰의 행태를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내가 노란 연필을 꺼내 이 부분을 밑줄을 긋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카페로 들어오더니 파전인가 부추전인가를 꺼내며 "전 좀 드실래요?"하고 물었다. 나는 권하자마자 냅다 좋아요,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더니 할머니가 너무 쉽게 단념을 하고는 사장을 불러 자기들끼리만 전을 나눠 먹는 것이었다. 분했지만 그래도 내가 초연한 척 책을 계속 읽고 있었더니 할머니가 이번엔 나무 그릇에 담긴 귤을 가지고 왔다. “이게 옆 농장에서 딴 유기농 귤인데요, 맛있어요.”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귤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귤이 너무 시고 맛이 없었다. 나도 전을 먹고 싶은데. 화가 나서 책을 덮고 밖으로 나오니 가을 하늘이 맑기 그지없었다.

카페를 나와 어제 갔던 동네 슈퍼에 다시 들렀다. 밤에 혼자 소주라도 마시고 싶어 지면 속수무책이라 미리 한 병 사놓으려는 속셈에서였다. 한라산 소주를 한 병 집어 들고 매대에 쌓여 있는 참치캔을 고르다가 무심코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공교롭게도 밑에 계란판이 있었다. 참치캔이 계란을 두 개나 깼다. 나는 아저씨에게 계란을 깨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며 수돗가에 가서 계란이 묻은 참치캔을 씻으며 멀쩡한 계란 세 개만 달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우주에 살았으면 안 깨져을 텐데, 지구에 살아서..."라고 웃으며 농담을 했다. 중력 때문에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보는 사이인데 이 정도 농담을 하다니 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이 분을 ‘중력 아저씨’라고 불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에 들어와 쌀을 씻어 말하는 전기밥솥에 넣고 테더링을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더니 된다. 얏호. 다행이다.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을 하면서 핸드폰을 동시에 열어 아까 아내가 주문하라고 카톡으로 보내준 사골국 사진을 확인하고 쿠팡에 주문을 넣었다. 무항생제 한우 사골곰탕 300g짜리 여덟 봉. 정가 33,000원짜리인데 할인가로 26,800원이었다. 결재를 하고 보니 다음 주 화요일에나 도착한단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주문받으면 그때 비로소 소를 잡기 시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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