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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7. 2019

시외버스와 고기국수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3



제주도에 온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이런저런 책을 들춰 보았고 SNS에 들어가 다른 이들이 쓴 글, 내가 올린 글과 사진 밑에 달린 댓글들을 읽었고 다음 주 '독하다 토요일' 마지막 모임에서 함께 읽고 얘기할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도 전자책으로 조금 읽었다. 새벽은 조용하고 아무런 방해도 없어서 뭔가를 쓰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나는 노트를 펴놓고 이것저것 끄적이며 메모를 하다가 불현듯 일어나 거실 책장에 있는 책 중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발견하고는 펼쳐서 앞 챕터부터 읽기 시작했다. 김영하가 중국 상하이에 있는 공항에서 여권이 없어 추방을 당하는 <추방과 멀미>라는 에피소드였는데 중국 여행 때문에 플래시백된 학창 시절의 추억 부분에서 '서대문 안 형사'라는 분과의 인연 이야기가 찡했다. 아, 김영하가 운동권이었구나, 이건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을 소재로 한 인생 에세이로구나, 등등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어제 해놓은 밥이 전기밥솥에 남아 있었지만 아침이니까  캐비초크만 타서 먹고 좀 놀다가 오늘은 마트에 한 번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에 농협 공판장이 있는 줄 알았으나 그건 하나로마트가 아니라 그냥 농협사무소임이 밝혀졌으므로 마을 어귀 작은 상점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하나로마트가 있는 곳까지 나가야 장을 볼 수 있었다. 버스 시간을 알 수가 없어서 10시 20분쯤 무조건 정류장으로 나갔더니 붙어 있는 버스 노선도와 시간표가 여러 개인데다 불친절하기까지 해서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래프나 표를 잘 못 읽기로 유명한데 여긴 낯선 고장이다 보니 버스 시간표 난독증은 평소보다 더 심각했다. 그 와중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버스 한 대당 간격이 한 시간 반씩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즉 버스 하나를 놓치면 한 시간 반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내가 타고 나가야할 버스가 두 대 중 하나임을 알아냈다. 둘 다 11시 10분에 오는 버스다. 나는 11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가방에서 전자책을 꺼내 김혼비의 [아무튼 술]을 읽기 시작했다. 전에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다 읽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제대로 못한 모든 일들엔 '시간이 없어서'라는 상투적인 변명이 붙어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못 보고, 시간이 없어서 친구들을 못 만나고, 시간이 없어서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를 못 드리고,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고...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있으니까 김혼비의 책을 읽는다. 신난다. 전에 읽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글발이 좋은 작가다. 꽤 엘리트인 것 같은데 그런 학력이나 경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술'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관과 애정사, 대인관계, 경력 등을 잘난 척 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아내의 독후감에 명로진 선생이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고 댓글을 단 게 딱 맞춤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유머를 잘 구사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술로 인한 일탈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절묘함이 있었다.

김혼비의 글이 절묘한 가운데 어느덧 11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고 나는 전자책을 가방에 넣은 뒤 두 눈을 부릅뜨고 버스를 기다렸다. 11시 8분 경 버스정류장으로 75세쯤 되어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홀연히 나타나셨다. 이 분은 버스 시간표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인 것 같았다...11시 10분이 되었다.

"버스가 올 때가 됐는데..."
"그러게, 올 때가 지났는데..."

우리는 혼잣말을 빙자해 서로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먼저 자세를 낮추셨다.

"여기 사시우?"
"아녜요. 서울서 왔어요."
 "버스가 올 때가 됐는데..."
"그러게요. 오겠죠, 뭐."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 사이 트럭만 몇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오늘 11시 10분 차는 안 오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그런 경우가 있나요?" 라고 내가 흥분해서 외쳤더니 "없지..." 라고 대답하긴 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러신 건지 자신이 없이서 그러신 건지 잘 구분이 안 갔다. 나는 11시 10분 버스를 타고 나가 하나로마트 근처에서 점심도 먹고 들어올 계산이 어그러지자 더 짜증이 났다. 사실 택시를 타고 나가면 오천 원도 안 나오는 거리였다. "여기선 택시를 어떻게 부르는 줄 모르니..."라고 내가 혼잣말을 했더니 할아버지가 대뜸 "784-82**, 이게 이 지역 콜택시 번화야."라고 반말로 친근함을 표시하셨다. 어떻게 번호를 그렇게 외우고 계신가 신기해서 쳐다보니 할아버지가 목에 걸고 있는 교통카드 지갑에 커다란 글씨로 이런저런 전화번호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씀을 드리고 오늘은 그냥 들어가겠다고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10분만 더 기다려 보다가 당신도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허무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제 택시 타고 들어오면서 봐 뒀던 국숫집으로 가서 고기국수를 하나 시켰다. 국물이 시원하고 돼지고기도 맛이 좋았다. '그래, 제주도는 역시 고기국수지' 라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열두 시가 되자 점심 손님들이 몇 명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관광객처럼 산책로를 따라 터덜터덜 걷다가 마을 어귀에 새겨져 있는 '범죄없는마을'이라는 글귀를 발견하고는 저기서 범 자를 빼면 '죄 없는 마을'이라는 뜻이 될까 '뭐든 죄다 없는 마을'이 될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을 좀 했다. 그러나 이내 산책을 포기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급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공중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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