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Nov 08. 2019

A4지와 한우등심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4


"흔히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같은 실수밖에 하지 않아요."

며칠 전에 읽은 사노 요코 여사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에 나오는 말이다. 어제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지 않는 바람에 하나로마트에 가는 그 쉬운 일정을 포기해야 했던 나는 오늘 요코 여사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며 카카오맵 어플을 다시 켰다. 과연 제주도 구석구석의 정거장까지 다 표시가 되어 있고 버스 도착까지 남은 시간도 리얼타임으로 표시가 되고 있었다. 갑자기 문명인이 된 것 같은 흐뭇한 마음이 된 나는 예정된 버스를 집어타고 하나로마트에 갔다. 아내가 야채나 고기 같은 걸 좀 사다 놓고 먹으라고 해서 간 건데  술을 마시는 인간들은 반찬만 봐도 다 안주로 보인다더니, 내가 그랬다. 나도 모르게 프랑크소시지부터 허겁지겁 샀고 거기에 어울리는 야채와 풋고추, 청양고추를 바구니에 넣었다. 사실  그런 것들을 사기 전에 A4지 묶음부터 하나 사고 싶었다. 나는 글을 쓸 때 빈 종이 위에 단어나 문장들을 아무렇게나 좀 흩뿌려 놓고 써야 잘 써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습성이 있는데 마침 쓰던 수첩도 다 차고 어쩌다 보니 제주도에 가져온 종이가 한 장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주 시내도 아니고 시골에서 A4지를 구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역시 하나로마트 안엔 농산물과 공산품만 즐비할 뿐 어디를 봐도 종이나 수첩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플로 지도를 다시 띄워보니 마트 바로 옆에 중학교가 하나 있었다. 오, 학교가 있으면 그 앞에 문방구도 있겠지. 나는 집어 들었던 소시지와 고추 등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 빈 몸으로 마트에서 나와 중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이럴 수가. 중학교 앞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길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혹시나 하고 중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학교 안에 문방구나 매점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평일 대낮에 무단으로 교문을 통과해도 달려 나오는 수위 아저씨 하나 없었고 문방구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다들 수업 중인지 학교 안은 너무나 적막했다. 내가 선량한 사람이었기 망정이지 변태 성추행범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이렇게 경비가 허술한가 싶었지만 나는 변태가 아니었고 학교 안엔 매점 비슷한 것도 없었으므로 아무 일도 없이 다시 학교를 나와 하나로마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트로 들어가면서 어떤 아주머니에게 "혹시 여기 종이 같은 것도 팔까요?"라고 물어봤더니 손으로 왼쪽을 무심히 가리키며 저리로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문방구가 보였다. 마트와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문방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중학교까지 찾아가서 헤매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몰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문방구에서 흰색 A4지 묶음 하나를 사는 데 성공한 나는 다시 마트 안으로 들어가 프랑크소시지와 야채와 풋고추, 청양고추 등을 장바구니에 차례로 넣었다.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등심도 조금 샀다. 내가 어리숙해 보였는지 아줌마가 지금 세일 중이라고 나를 적극적으로 붙잡았다. 주류 코너에 가서 한라산 21도도 좀 샀다. 유리병과 PET가 다 있길래 두 가지 다 샀다.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지만 갈 때는 택시를 타자고 결심했다. 어제 정류장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콜택시 번호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금방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도착한 택시가 나를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어디 어디 양로원 앞으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 아저씨가 처음엔 거기 안다고 하고 출발했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고 "내비  찍고 갈까요?"라고 물었다. 자기가 거길 알긴 아는데 조금 헷갈린다는 것이었다. 양로원 주변이냐고 묻길래 나는 초행길이라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결국은 차를 잠깐 세우고 주소를 불러줘야 했다. 구주소를 댔더니 내비게이션에 뜨질 않았다. 다시 신주소로 바꿔 입력했지만 여전히 내비게이션 창엔 목적지가 뜨지 않았다. 내가 카카오내비 어플을 켜며 "제가 가진 내비로 갈까요?"라고 했더니 기사 아저씨가 자기 핸드폰을 뒤로 넘겨주며 그러지 말고 여기다 주소를 찍어 넣으라고 했다. 아저씨의 핸드폰을 보니 내가 가진 것과 똑같은 카카오 내비였다. 나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냥 목적지를 찍어 기사 아저씨에게 건넸다. 나에게 휴대폰을 받아 운전석 앞 자석판에 붙인 아저씨는 "아, 이거 내가 아는 길이에요."라고 말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또다시 밀려왔다. 기사 아저씨가 양로원 가는 길이 이쪽 길이 있고 저쪽 길이 있는데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아저씨,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초행길이거든요,라고 말하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사 아저씨는 "이상하게 나는 이 길이 맨날 헷갈려..." 라며 혼잣말인지 반말이지 모를 독백을 내뱉고 있었고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드는 나는 고개를 외로 꼬고 계속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니 '홈 스윗 홈'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심지어 여긴 내 집도 아닌데. 쌀을 씻고 된장을 풀어 점심을 해 먹고 설거지를 했다. 아내는 서울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작자는 제주도에 혼자 내려와서 이러고 있으니 참,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로 기어 올라가 낮잠을 30분 정도 달게 잤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낙서를 끄적이다가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 마침 제주도에 온다던 배우 이승연이 생각나서 카톡을 했더니 당장 전화가 왔다(화제의 독립영화 [벌새]에서 엄마로 나온 그 이승연 맞다). 지금 제주도인데 괜찮으면 저녁에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어울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거기까지는 너무 먼 곳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에 보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와 책을 좀 읽다가 아내와 통화를 하고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냈다. 아내는 이번에 '독하다 토요일'에서 읽기로 한 은희경의 소설이 너무 후졌다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집에 있는 나쓰메 소세끼 전집이나 다 읽지 그러냐고 했고 아내는 그것도 좋은데 일단 지금 읽고 있는 진회숙의 [우리 기쁜 젊은 날]부터 먼저 끝내겠다고 했다. 나는 소고기 등심을 에어 프이라이어에 구워 먹을 생각이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중간에 뒤집는 걸 잊지 말라고 팁을 전해줬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오늘의 일기를 쓰며 에어 프라이어에 등심을 넣고 7분을 돌린 뒤 뒤집으려고 꺼내보니 고기가 그대로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콘센트를 살펴보니 에어 프라이어 대신 커피포트 줄이 꽂혀 있었다. 커피포트 줄을 빼고 콘센트에 다시 에어 프라이어 줄을 꽂고 기계를 돌렸다. 꽤 괜찮은 등심구이가 탄생했다. 지금 그 고기에 한라산을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귀신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