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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9. 2019

고독과 외로움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5

점심을 먹기 전에 집 근처에 있는 곶자왈로 산책을 갔다. 습지보호지역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곳으로 들어서니 원시림이 빽빽하게 우거져서 대낮인데도 길이 어두울 정도였다. 숲 안쪽으로 들어가니 땅은 축축하고 잎이 뾰족뾰족한 고사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혼자 숲길을 걸으며 만약 이 세상에 '술친구' 같은 직업이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있는 '쇼 탤런트'처럼 (연기 생활은 전혀 안 하고 오직 토크쇼에 패널로만 출연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다) 오직 술자리에 끼어 같이 술을 마시며 즐겁게 얘기만 하는데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난 어쩌면 그 직업을 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이 그리 세진 않지만 술자리를 매우 좋아하고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물론 매일 술친구로 일을 하다가 간경화로 일찍 죽고 싶진 않으니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일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걸어야 한다. 술도 위스키나 증류주를 우선으로 하고 소주는 한라산이 제일 좋긴 한데 제주도가 아닌 이상 늘 구할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니니 일단 진로 빨간 거로 하고... 머릿속에서 한참 이런 헛소리를 주고받다가 곶자왈 맑은 공기 마시면서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술친구에 대한 꿈은 날아갔다.


오후엔 리디북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난다'에 꽂혀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김민정 시인의 산문집 [각설하고,]를 샀다. 노트북으로 결재한 후엔 리디북스 단말기의 '구매목록'으로 들어가 다운을 받아야 비로소 책을 읽을 수가 있는데 단말기에서 계속 에러가 났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다가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럴 땐 단말기를 로그아웃 시켰다가 다시 한번 켜보라고 했다. 역시 기계가 말을 안 들을 땐 껐다 켜는 게 최고인 모양이다. 나는 단말기 메뉴를 눌러서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그런데 로그아웃이 안 되는 것이었다. 기계는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로그아웃에 실패했습니다'라는 자막만 보여주고 있었다. 이젠 하다 하다 로그아웃도 실패를 하는구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노트북으로도 리디북스 뷰어가 말을 안 들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리디북스 어플을 다운로드한 뒤 김민정 시인의 책부터 읽다가 진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고 해서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는 카페로 찾아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더니 남자 사장님이 비알레떼 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서 뜨거운 물과 함께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나도 예전에 한동안 쓰던 아날로그식 커피 포트라 옛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카페 안에서 휴대폰을 와이파이 상태로 돌리면서 혹시나 하고 전자책 단말기도 와이파이를 켰더니 단번에 아까 산 책 두 권이 다운이 되는 것이었다. 커피숍의 와이파이가 강력해서  그런 것 같았다. 김민정 시인의 책 [각설하고,]는 꽤 오래전에 나온 산문집인데 앞부분부터 쭈욱 읽어나가다가 '촌스러워서 못살겠다'라는 제목의 사연에 팍 꽂혔다. 시인이 사진작가 민병헌 선생과 '누드'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하나 냈는데 대형 서점으로부터 유해하다는 판정을 받아 19금 딱지가 붙었고 인터넷 서점엔 표지조차 뜨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한심하고 촌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다음에 누군가 또 누드집을 낼 땐 작가나 모델만 누드를 찍는 게 아니라 그 책을 만든 편집자나 교정자, 홍보책임자까지도 책 뒤에 누드사진을 한 장씩 실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배가 나오고 몸매가 늘어지면 어떤가. 우리가 늘씬한 몸매 보려고 누드집을 사는 건 아니지 않나.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라이언 맥긴리 같은 부잣집 도련님들의 뻔한 수작보다는 훨씬 신나고 멋진 이벤트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베스트셀러였을 때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되었다. 시를 워낙 잘 쓰는 사람이니 산문인들 못 쓰겠냐 짐작은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박준의 산문들은 구체적인 사연들로 시작하면서도 그냥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늘 보편타당한 정서로 외연을 확장한 뒤 끝내 따뜻한 마음이 보이는 시적 여운을 남긴다. 이 산문집을 사시거든 부디 '아침밥'과 '환절기'라는 짧은 글을 꼭 찾아 읽어보시라. 시인의 산문은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페 안으로 예쁜 이십 대 여성 셋이 들어오더니 휴대폰과 디지털카메라로 계속 사진을 찍었다. 카페 구석구석을 찍는 건 물론 서로 모델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기도 하고 각자 자리에 앉아 셀카를 찍기도 했다. 예뻐서 좋긴 한데 너무 그러니까 꼴 보기가 싫어졌다. 벌써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값을 내고 얼른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해 먹었다. 식탁 위에 밥과 국, 반찬을 늘어놓고 먹는데 괜히 울컥했다. 설거지를 하고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냥 나온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들어가 오줌을 누었다. 혼자서 며칠을 지냈더니 드디어 좀 센치해진 모양이다. 오늘 읽은 박준의 산문집에 선배 시인이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맞아. 나는 외롭고 싶어 온 게 아니라 고독해지려고 제주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 고독하되 외로워하진 말자. 이따가 다시 오줌을 누러 화장실에 가면 거울 속에 있는 나에게 꼭 이렇게 말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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