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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0. 2019

행복하려면 항복하라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6

아침에 일어나 페이스북을 열어보니 1년 전 내가 썼던 공처가의 캘리가 뜨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어느 날 '행복은 매달려 있는 복이다'라는 문장을 갑자기 떠올렸는데 마침 종이가 없어서 커피숍에서 받은 영수증에다 볼펜으로 급하게 휘갈긴 글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의 행 자를 영어 'hang'으로 치환해서 장난을 쳐 본 것이었는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Hang복'이 항복으로 읽혔다. 그래, 공처가의 행복은 아내에게 항복하는 게 디폴트라 할 수 있지. 나는 사진을 휴대폰으로 담은 뒤 방금 생각난 내용을 사진 밑에 짧은 글로 써서 붙였다.  


아내는 가끔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해?"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그게 제일 유리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아무 생각이 없는 나는,
세상 살기가 무서운 나는
아내에게
매달려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쓴 것은
행복이 아니라 항복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무조건 항복이다.
저항을 포기한다.

저항과 의심에
무슨 행복이 있나.
나는 진즉에 항복으로 전향했다.
그게 제일 유리하니까.

항복만이 행복이다.

글을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직후  다시 보니 사진 아랫부분이 잘려서 'Hang'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급하게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진을 조절하여 다시 올렸으나 그새 이전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분들이 계셨다. 조금만 점검을 해서 올릴걸. 괜히 미안했다.

캐비초크를 한 잔 타서 마시고 책을 좀 읽다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어제는 곶자왈을 갔었으니 오늘은 반대편에 있는 낙선동 4.3 유적지에 가보기로 했다. 제주는 싱그러운 바다와 푸르른 숲, 완만한 오름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천국 같은 곳이지만 4.3항쟁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맞은 비극의 땅이기도 했다. 제주를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 칭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4.3 때 남자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죽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도대체 몸을 숨길 만한 곳 하나 없는 이런 지형에서 억울하게 공비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섭고 비참했을까. 나는 제주의 비극을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 같은 책을 통해서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전라도의 여순반란사건'도 제주의 4.3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고 그 연장선이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사변인 것이다.

4.3유적지는 1948년 봄, 토벌대의 무력진압이 한창일 때, 마을 주민들과 무장대 간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토벌대는 죄 없는 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려 낮에는 성을 쌓거나 해자를 파게 하고 밤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망루에서 보초를 서게 했다. 하루 한 끼도 겨우 먹을까 말까 했던 주민들은 중노동과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나날들을 4 년이나 보내야 했다. 그들은 성 안에 함바집을 지어 공동생활을 했는데 말이 집이지 겨우 지붕으로 하늘만 가린 정도라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4.3 유적지는 이러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사방은 고요했다. 나는 경건한 마음이 되어 망루에 올라가 사진을 몇 장 찍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유적지 입구에서 빨간 잠바를 입은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풍채가 당당하고 얼굴빛이 맑고 진지해서 뭔가 당장에라도 4.3 항쟁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 짧은 눈인사를 교환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도 뭣해서 그냥 목례만 하고 나오려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연기 나는 거 보이죠? 저게 쓰레기 소각장 같은데, 연기가 굴뚝에서 안 나고 그 밑에서 나네...? 왜 그런지 혹시 알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질문의 내용으로 봐서는 4.3과 전혀 상관없는 분이었고 이 곳 사람도 아니었다. 근데 나한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김이 샌 나는 "글쎄요. 전 여기 안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얄밉게 대답하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유적지의 정취에 빠져서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몇 번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어제 당산동커피에서 열린 최용석 선생의 판소리극 <달문, 한 없이 좋은 사람> 렉처콘서트에 참석해 밤늦도록 뒷풀이를 하더니 취해서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글을 끄적이는데 생각대로 써지지 않아서 괴로웠다. 아내가 뒤늦게 전화를 걸어 어제 뒷풀이 2차를 감자탕집으로 갔었는데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아내는 김치에 소주를 마시느라 취했고 얼마 전 비건이 된 김탁환 선생은 고추 안주만으로 소주를 마시느라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후 4시가 되자 다시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내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무조건 오후 4시가 지나야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한다. 거의 언제나 오후 4시다.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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