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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2. 2019

이중 외박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7

일요일 밤은 늘 심란하다. 회사를 그만둬서 출근할 일이 없는데도 그렇다. 저녁을 먹고 책을 좀 읽다가 그만 잘까 했는데 오후에 농협의 ATM기에서 현금을 찾으며 확인했던 통장 잔고의 숫자가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결국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틀어 이런저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영상들을 건성으로 보다가 껐다가 또 켰다가를 반복하다가 두 시가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보일러가 고장 나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했다. 일단 고양이 세수라도 하고 출근하라고 했더니 어제도 머리를 안 감아서 오늘은 회사에 가서 머리를 감을 생각이라고 했다. 역시 집안엔 남자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평소에도 보일러 등이 고장 나면 아내가 다 알아서 고치고 나는 구경만 했기 때문에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내 발을 쳐다보며 참 작다는 생각을 새삼 했고 그걸 시발점으로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잡아채 짧은 글을 하나 썼다. '평균 이하로 태어나도 평균의 삶을 살 수 있도록'이라는 조금 심각한 제목을 붙였다. 월요일쯤 배우 이승연이 이쪽으로 온다고 했었다.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지인들이 곶자왈에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 내가 묵고 있는 숙소와 가까운 데 있는 숲길을 한 번 안내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전에 글쓰기에 푹 빠져 있다가 문득 그 사실이 생각나서 승연에게 카톡을 해보니 자신은 감기에 걸려 어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는데 같이 지내는 지인 두 사람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지금은 혼자 그들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감기는 이제 어느 정도 나았다고 한다. 세 명이 여행을 하는데 한 명만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서로 못할 짓이었을 것이다. 나는 급할 것 없으니 점심 먹고 오후에 천천히 움직이라고 했다.

오후 4시경, 갑자기 내가 있는 곳 근처의 경로당까지 차를 몰고 거의 다 왔다는 카톡이 승연으로부터 왔다. 나는 뭔가 쓰고 있다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은지라 급하게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뛰어나갔다. 승연과 함께 온 사람들은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K라는 남성과 Y라는 여성이었다. K 씨는 나와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Y 씨는 숙취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뒷좌석에 앉아서 자고 있었다. '동백동산 습지보호구역'이라 쓰여 있는 숲 입구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곶자왈로 들어갔다. 뒤늦게 깨어난 Y 씨가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함께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걸었다. Y 씨는 아직도 술기운이 덜 깨서 걷는 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 Y 씨가 K 씨에게 자기 손을 잡고 걸어달라고 했고 그걸 본 승연이 K 선배가 여자 손 잡고 걷는 건 처음 본다며 놀렸다. 손을 잡고 걷는다고 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또 여자분이 남자분에게 충전을 받으며 걷겠다는데 우리가 반대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럼 앞으로 K 씨의 호를 '충전'이라고 하거나 별명을 '미스터 충전기'라고 부르자고 했고 세 사람이 박수를 치며 재밌다고 했다.

한 시간 정도 천천히 숲길을 걸어 다시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다. 날이 약간 쌀쌀해져서 어디로 옮기기 전에 내가 있는 곳에 잠깐 들러 차를 한 잔씩 마시기로 했다. 근처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기 전에 승연이 누군가와 계속 카톡을 하더니 나한테 혹시 소고기도 좋아하냐고 물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배우 박혁권 선배를 만나기로 했는데 한우집에서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K 씨의 차를 타고 송당에 있는 '한울타리 한우'라는 고깃집으로 갔다. 우리가 조금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정확히 7시가 되자 박혁권 씨가 나타났다. 나는 윤성호 감독의 독립영화들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나중에 JTBC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의 남편으로 나와 더 유명해진 배우였다. 2년 전인가부터 제주도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박혁권 씨는 여기는 자기가 무척 좋아해서 자주 오는 고깃집이라고 말하며 안쪽 매장으로 들어가 치맛살, 살치살 등 부위별로 소고기를 사 와서 시원시원한 솜씨로 구웠다. 일종의 정육식당 같은 시스템이라 고깃값도 무척 싼 편이었다. 술은 한라산 소주를 시켰는데 어제 과음을 한 두 사람 중 Y 씨는 소주를 못 마시겠다며 테라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고 박혁권 씨와 K 씨는 각자의 차 운전 때문에 술을 삼갔다. 결국 나와 승연 둘만 술을 마시는 형국이 되어버렸지만 우리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박혁권 씨가 구워주는 고기들을 냉큼냉큼 집어먹으며 연거푸 소주를 마셨다. 박혁권 씨는 고기를 정말 잘 구웠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늘 자기가 여기 데려와서 고기를 구워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만 안 마시는 게 아니고 요즘은 술을 두 달에 딱 한 번 정도만 마신다고 했다. 그렇게 정해놓고 술을 마시며 흐트러지지 않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나도 퇴직 후 6월부터 금주를 했던 일을 얘기하며 사람에게는 때로 그런 절제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오래전 CGV압구정을 지나다가 아무 정보 없이 봤던 [계몽영화]라는 작품  얘기를 했더니 박혁권 씨도 반가워했다. 거기서 박혁권의 아내로 나왔던 오우정이라는 배우가 마음에 들었었는데 그 후로 한 번도 다른 데서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하며 의외로 너무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더니 옆에서 승연이 "오빠, 그 영화는 이미 독립영화계의 전설이에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와 박혁권 씨와 헤어지고 K 씨의 집으로 가서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K 씨는 이층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집이 무척 넓었다. 이미 술이 좀 취한 나는 이미 말할 때마다 발음이 새고 있었고 우리는 어느새 만난 지 무척 오래된 친구들처럼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다. 새벽 한 시쯤 내가 술잔을 떨어트려 깨는 바람에 K 씨가 진공청소기로 마루를 여러 번 청소하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아침 아홉 시 반쯤 일어나니 나 혼자 넓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채로 잠들긴 했지만 신용카드와 손수건, 안경 닦는 수건, 스마트폰 등을 한 곳에 잘 수습해 둔 것을 보니 엉망으로 취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집을 나와 낯선 곳에서 지내는 주제에 또 외박을 하다니. 그렇다면 이건 이중 외박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마루로 나가보니 누군가 방 안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예술인들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나는 고맙게 잘 먹고 잘 자고 간다는 말을 써놓고 나가려고 집안을 뒤져보았으나 어디서도 종이와 펜을 찾을 수가 없었다. Y 씨의 배낭에서 겨우 볼펜을 찾아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전기세  고지서 봉투 귀퉁이에 짧은 메모를 남기고 나왔다.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평대리였다. 스마트폰 지도 어플로 평대초등학교 앞에서 버스가 선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밭에서 일을 하는 할머니에게 이리로 가면 초등학교가 나오는 게 맞냐고 물었더니 뭐라 뭐라 소리를 치며 알려주시는데 제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왼쪽으로 가라는 건지 오른쪽으로 가라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 지도 어플을 열고 천천히 걸으며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멀리 바다가 넘실대는 게 보였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자 그렇게 급한 일도 없는데 좀 천천히 바다를 구경하다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배도 무척 고팠다. 평대리 앞바다를 천천히 걷다가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기사 아저씨를 불렀는데 갑자기 다시 정상으로 작동이 된다는 것이었다. 컴퓨터나 가전제품이 고장 나서 말을 안 듣다가 수리센터가 가져가면 갑자기 멀쩡하게 작동이 잘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우리는 깔깔깔 웃으며 사사건건 우리를 배신하는 세상을 규탄했다. 전화를 끊고 '대수굴식당'이라는 곳에 들어가 성게미역국을 주문했다. 국물이 시원하니 맛이 좋았다. 역시 제주도는 성게미역국이지, 하면서 국은 물론 밥까지 싹싹 다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초등학교 앞으로 가서 버스를 타니 갈아타는 지점이 지난번에 왔던 하나로마트 근처였다. 나는 그동안 손톱이 너무 길어졌는 생각에 손톱깎이를 하나 사려고 하나로마트로 갔다. 손톱깎이를 사면서 방울토마토도 한 상자 사고 인스턴트 커피도 종류 별로 세 병이나 구입했다. 집에 사골국 사놓은 게 생각나서 떡국용 쌀떡도 한 봉지 샀다.

어느새 불룩해진 비닐봉지를 들고 버스를 탔는데 가만히 보니 거꾸로 가는 버스였다. 나는 급하게 소리를 치며 지르며 기사 아저씨에게 잘못 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버스에 탄 할머니들이 좀 멀기는 해도 그냥 앉아 있으면 결국 거기로 간다며 나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배차 간격이 넓어서 그냥 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술이 덜 깬 상태라 욱욱 멀미를 하면서 한참을 달리다 겨우 집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였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글도 써지질 않았다. 운동을 너무 안 하는 것 같아서 유튜브로 프랭크 하는 법을 검색해 일 분간 프랭크를 하다 거실에 쭉 뻗어버렸다. 간단히 저녁을 지어먹고 밖으로 나가 십여 분을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돌아왔다. 좀 어두운 거리였는데 나보다 빠르게 걷는 어떤 여자분이 갑자기 앞으로 확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 여자분도 저녁 운동 중인 것 같았다. 이렇게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하루 같은 이틀이 지나갔다.

한울타리 한우 주소 : 제주시 구좌읍 송당서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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