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의 캘리
공처가는
공포영화 대신
아내의 눈치를 본다
내가 생애 최초로 본 공포영화는 하얀 한복을 입은 여자가 숲 속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는 얘기였다. 너무 여려서 제목이나주연배우도 생각이 전혀 안 난다. 아마도 B급으로 만든 [월하의 공동묘지] 아류 정도였을 것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천막 치고 틀어준 영화였는지 삼류극장에 가서 본 건지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공포영화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써스페리아]였다. 그리고 악마의 숫자 '666'이 유행했던 [엑소시스트]. 이건 영화를 먼저 보고 재미있어서 책까지 찾아 읽은 경우다. [오멘] 시리즈는 이상하게 한 편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두고두고 아쉽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공포영화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스크림]인데 이건 감독인 웨스 크레이븐도 훌륭하지만 캐빈 윌리엄슨의 각본이 더 뛰어난 경우라 하겠다.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이쩌면 '공포 영화의 가면을 쓴 코미디 영화'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크림]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가면을 쓴 범인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피칠갑을 하는 슬래셔 무비임이 분명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학교에서 교장 선생이 살해됐다는 전화를 받은 학생이 "야, 교장 시체가 축구 골대 위에 걸려 있대. 누가 치우기 전에 빨리 보라 가자!"라고 소리치는 블랙 유머들의 항연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코미디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공포영화도 잘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든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니까.
아주 오래전에 잡지에서 가수 전영록의 방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뮤직비디오와 영화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사진 밑엔 '영화를 좋아해서 컬렉션을 하는데 특히 공포영화를 좋아해서
그쪽 방면의 영화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내가 너무 어렸고 공포영화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에 전영록이란 가수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전영록은 진정한 영화 마니아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 후에 수많은 영화를 보았으니 공포 영화 또한 많이 보게 되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포영화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신호탄인 경우가 많았다.
[링]에서 TV 브라운관 밖으로 기어 나오던 귀신은 정말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었고 [식스 센스]의 반전은 지금도 스포일러를 논할 때 항상 거론되는 작품이다. 스필버그의 초기작 [죠스]는 또 어떤가. 제작비가 모자라서 나무로 만든 상어 '목합'을 썼던 스필버그는 상어를 보여주지 않고 존 윌리엄스의 음악 "빠~밤, 빠~밤, 빠밤 빠밤..." 하는 음악과 함께 카메라만 효과적으로 흔들어서 세계 최초의 블럭버스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공포영화를 거의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아내가 자극적이고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칼이나 날카로운 무기들이 나오는 걸 끔찍이 싫어해서 [아저씨]를 볼 때도 칼이 나오면 무조건 눈을 감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요즘은 순하고 착한 영화를 위주로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내가 어쩌다 공포영화를 한 편 보러 가자고 하면 그냥 당신 혼자 가서 보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공처가는 공포영화 대신 아내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