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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4. 2019

유리를 깨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9

아내가 아침에 서울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갔다며 춥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제주도도 오늘은 바람이 불고 좀 추워졌다. 수능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추워지는 게 신기하다. 아침에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가서 플라스틱과 종이, 깡통 등을 버렸다. 다만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이 없기에 거기 붙어있는 면사무소 안내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제주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공무원이 전화를 받았다. 사투리가 심해서 그런지 전화기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와중에 결국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으니(장소를 옮겨 새로 마련된 쓰레기장이었다) 그냥 회색 통에 버리고 가면 나중에 누군가 수습을 할 것이라고 했다. 회색 통 안을 들여다보니 터진 음식물 봉투들이 이미 널브러져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일 아침에 서울에 잠깐 올라가기 전에 여기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가야겠다.  

집에 와서 전에 써 놓은 원고들을 이리저리 고치기도 하고 목차에 맞게 배열도 하고 하면서 오전을 다 보냈다. 지금 이 순간, 이  넓은 집에 나 혼자 있고 또 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게 새삼 고맙고 즐거웠다. 글을 쓰다가 스마트폰으로 브런치에 잠깐 들어가 보니 의외로 내가 발행한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매거진 중 <A4지와 한우등심> 과 <시외버스와 고기국수> 등이 메인 페이지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래도 '제주에서 한 달 살기'라는 문장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인 것 같았다.

점심을 먹을 땐 와챠플레이로 [멜로가 체질]을 잠깐 봤다. 나는 서울에서도 집에서 밥을 먹을 땐 웬만하면 TV를 틀어놓는 습관이 있는데 여기 와서도 상을 차리거나 밥을 먹을 땐 뭔가 우리나라 방송 콘텐츠를 무심하게 틀어놓고(자막이 없어도 되니까) 보고싶어진다. 이병헌 감독의 '멜로가 체질'은 이미 대충 봤지만 대사가 아주 좋고 연기들도 다 잘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설거지를 하고 다시 이런저런 글을 좀 써보다가 스마트폰으로 와챠플레이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소릴 들은 영화가 야해 봐야 얼마나 야할 것이며 내용은 또 얼마나 유치하고 황당할까 하는 생각에 전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뻔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은 물론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던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갔는지 궁금했다.

시애틀의 거대한 빌딩 앞에 선 아나스타샤. 대학생인 그녀는 때마침 몸살이 난 룸메이트 대신 27살의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촌스러운 가디건에 '꽃가라' 남방을 받쳐 입고 사장실로 들어선 아나스타샤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레이의 아우라에 눌려 제대로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하고 버벅거린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가 관심을 보인다.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토마스 하디 중 누가 당신을 문학으로 이끌었나요?"라고 묻는 그레이에게 아나스타샤는 "하디."라고 겨우 대답을 한다.  

흥미로운 전개다. 그러나 이걸 계속 볼 마음의 여유는 없어서 끄고 나중에 이어서 보기로 했다. 우선 세련된 콘텐츠 냄새가 났다. 나오기 전에 와챠플레이에 달린 감상평 몇 개를 읽어보니 음악이 아주 세련됐다는 칭찬이 많았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천천히 주의 깊게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다운로드하여 읽고 싶어서 그제 갔던 커피숍에 다시 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더니 역시 비알레떼 포트에 가져다준다. 여기는 와이파이가 빵빵해서 에버노트나 예전 웹 상의 글들도 찾기가 아주 손쉽다. 나는 창비에서 나온 장류진의 소설을 내려받아서 리디북스 단말기로 읽기 시작했다. 표제작은 두 번째로 실려 있고 첫 작품의 제목이 <잘 살겠습니다>였다.

청첩장을 돌리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내 비밀연애를 했던 주인공은 딱 결혼식에 올 만한 사람들에게만 청첩장을 돌리고 있었는데 별로 친하지 않은 입사 동기 '빛나 언니'가 청첩장을 달라고 하면서 작은 갈등이 야기된다. 이 언니는 지나치게 긴 생머리를 부담스럽게 기르고 다녀서 '총무과 라푼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모자라 회장을 비롯한 회사 전체 구성원에게 실수로 전체 메일을 전송하는 바람에 '전체 회신녀'라는 별명까지 얻은 눈치 없고 어디 한 군데가 비어있는 여자다. 거기에 비하면 주인공은 악착같고 계산이 지나치게 분명한 여자다. 청첩에 얽힌 짧은 이야기지만 이슈가 분명하고 딴 데로 새지 않아 읽는 재미가 좋다. 더구나 '판교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화제가 되었던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도 보았듯이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친숙도를 '축의금 5만 원 정도의 사이'라고 표현하는 건 뻔해 보여도 통찰력이 있는 소설가의 기지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오래전부터 남모르게 계속 소설을 써왔던 사람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서 더 믿음이 가는 소설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다가 출출해져서 혹시 빵 같은 거 있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이 조청과 함께 빵을 따뜻하게 구워서 가져다주었다. 맛이 좋았다. 그러나 5시 반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빵을 조금 남긴 채 얼마냐고 물으며 주머니에서 카드와 만 원짜리를 한꺼번에 꺼냈더니 "그럼 만 원만 주세요."라고 한다. 고맙습니다. 천 원은 다음 주에 와서 드릴게요,라고 하며 문밖으로 몸을 돌렸는데  꽝! 하고 머리가 유리문에 부딪혔다. 문 전체 크기의 유리문이라서 당연히 열려 있는 줄 알고 전속력으로 걸어가다 그대로 부딪힌 것이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더니 사장님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잠깐 앉았다 가세요."라고 하신다. 그러나 너무 창피하고 경황이 없어서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는 뛰다시피 골목으로 달려 나왔다. 그나마 유리문도 깨지지 않고 머리에서 피도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음 주에 가면 잊지 말고 꼭 천 원 더 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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