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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8. 2019

세븐일레븐 성북점과 성북문화점, 그리고 벌새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0

나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지도 않는 주제에 독서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독(讀)하다 토요일'이다. 어느 해 연말 우리 부부의 단골 커피숍인 '성북동콩집'에서 일 년간 읽었던 책들의 독후감을 모둠으로 몰아서 쓰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그러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책 읽는 모임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달 두 번째 토요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으니까 '독한 토요일'로 하면 재미겠다 했다가 몇 시간만에 '독하다 토요일'이 더 낫겠어, 하고 이름을 확정한 뒤 아내와 내 주변 사람을 불러 모아 모임을 꾸렸던 것이다. 그 후로 한 달에 한번 모여 정해진 책을 한 시간 정도 묵독하고 세 시부터 책에 대한 얘기를 조금 나누다가 얼른 술집으로 달려가는 모임을 6개월 단위로 세 번째 시즌까지 어어오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모토가 '뭐든 너무 열심히 하진 말자'였으므로 모여서 대충 책 얘기를 하는 척하다가 헤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막상 진행을 해보니 의외로 회원들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었다. 덕분에 똑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회원들마다 느끼는 점도 다르고 통찰하는 바도 달라서 나는 어이없게도 매번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풍성하게 얻어가는 행운을 누리며 살고 있다.

금요일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토요일이 '독하다 토요일 시즌3'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영등포에 있는 카페 '곁愛'와 '비덕살롱'에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맛있는 음식과 샴페인, 와인 등을 마시며 뻑적지근한 송년회를 했다. 같은 성북동 주민이자 전직 '옆집 총각' 이었던 동현과는 만섬포차에 가서 각 일 병씩 소주도 더 마시고 헤어졌다. 일요일 아침에 인터파크에 들어가 보니 월요일 제주행 티켓 중 27,400원짜리 제주항공이 있었다. 금요일에 올 때는 37,400원짜리 티웨이항공이었는데 기어코 더 싼 교통편을 찾아낸 것이다. 모처럼 성북동 소행성에서 빈둥빈둥 하루 종일 쉬다가 저녁때가 되어 밥 대신 냉동만두에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아내를 꼬셨다. 마침 하루 종일 비도 내리고 해서 센티멘털해졌던 아내도 평소와 다르게 금방 넘어왔다. 만두를 프라이팬에 굽고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꺼내 마시다가 빗속을 뚫고 편의점까지 뛰어가서 소주 세 병과 냉동만두를 하나 더 사왔다. 산 걸 다 마셔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나 없을 때 아내가 한 잔 하고 싶어지는 저녁이면 혼자 꺼내 먹으라고 좀 넉넉히 사온 것이다. 이내 술에 취한 우리는 재미없는 TV를 보며 투덜대다가 죄 없는 고양이 순자를 괴롭히며 놀다가 지쳐서 양치도 못하고 그대로 뻗어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로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듣다가 나가서 쓰레기 정리를 좀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처리했다. 분리수거는 늘 내가 하던 거라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약간이라도 갈무리를 해둔 것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짐을 싸다가 문득 국민카드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메인카드로 쓰는 것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제 마지막으로 쓴 게 편의점일 텐데. 그렇다면 츄리닝 주머니에 있어야 하는데. 혹시 웃도리 주머니에 넣었나? 지갑에 넣었나? 마루의 옷 넣어 두는 장 밑으로 들어갔나? 꼬박 한 시간 동안 카드를 찾느라 한숨을 쉬고 씩씩거리는 나를 지켜보던 아내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러니까 제발 지갑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라고, 그렇게 여러 번 잃어버리면서도(이 카드도 한 달 전쯤 재발급을 받은 카드였다) 또 카드 한 장만 달랑 들고나갔었냐고 입에서 불을 뿜었다. 면목이 없었고 할 말도 없었지만 가장 문제는 끝끝내 카드가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편의점에 놔두고 온 것은 아닐까 해서 지도찾기로 '세븐일레븐'을 검색했더니 성북점이 나왔다. 전화를 해서 어젯밤 손님 중에 국민카드 흘리고 간 게 혹시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여자분이 "사람들이 어제 놓고 간 카드 중에 삼성카드, 현대카드는 하나씩 있는데 국민카드만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한숨이 나오고 기운이 쪽 빠졌다. 일단 아쉬운 대로 지갑에 있는 우리카드를 쓰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아내와 성북동10길을 내려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 어제 전달받은 신용카드가 있느냐고 물었다. 통화를 하고 계시던 여자분에게 아까 통화했던 사람이라고 했더니 "저는 통화 안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그래도 혹시나 하고 왔다고 국민카드 있나 찾아봐 달라고 했더니 여자분이 전화를 끊고는 금고 옆에 있던 신용카드를 집어서 "이거예요?"라고 내미는 것이었다. 내 카드였다. 기쁘면서도 황당했다. 아니, 있으면서 왜 아까는 없다고 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는 나와 통화를 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지도찾기를 검색해 보니 거기는 세븐일레븐 '성북점'이 아니라 세븐일레븐 '성북문화점'이었다. 제기랄. 밖으로 나와 아내에게 카드를 보여주며 찾았다고 소리를 질렀더니 자신은 이미 내가 엉뚱한 세븐일레븐에 전화했을 거란 짐작을 했었지만 남편이라는 작자가 너무 괴로워하고 있기에 차마 그런 추리를 당시에는 표출할 수 없었노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카드 문제가 해결된 후 나는 아내를 따라 은행에 가서 아내가 돈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아내도 돈이 없지만 나 역시 돈이 없으므로 딱히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은행에서 나와 동양서림에 들어가 고은정 선생이 준 문화상품권으로 책을 한 권씩 샀다. 나는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이라는 소설을 샀고 아내는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라는 인문학 책을 샀다. 우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불량식품이나 먹자, 하고 떡볶이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고, 마침 눈 앞에 나타난 떡볶이집에 들어가 "와, 음식이 아주 불량하고 좋은데!"라고 허세를 부린 뒤 당장 닥칠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만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어제저녁 공익광고 아이디어 문제로 잠깐 얘기했던  Y감독과 통화를 하고 끊었더니 규환이 형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이 형이 웬일이시지? 하고 전화를 했더니 안 받는다. 전철이 혼잡한 데다 한중일 안내방송이 워낙 심란해서 나는 곧 규환이 형의 전화를 잊었다. 그런데 제주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도중에 다시 규환이 형의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싱겁게도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전화였다. 규환이 형은 미국에서 지내다가 일이 있을 때만 가끔 귀국하는 분인데 나한테 연락을 한 걸 보니 지금 한국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 근무 마지막 날 회사 근처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일이 있기에 내가 퇴직한 것은 형도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쓰려고 제주도에 한 달 간 내려왔다고 했더니 규환이 형은 정말 기뻐하면서 꼭 좋은 글을 쓰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CF감독이었던 선배의 격려를 받다니, 이게 다 무슨 복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환이 형은 혹시 [벌새]라는 영화를 보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자기가 우연히 그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너는 그 영화를 봤을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그 영화를 봤고 너무나 감동했으며 마침 그 영화에서 주인공 소녀의 엄마로 나왔던 이승연이라는 배우와 개인적으로 친해 자주 만난다는 얘기까지 했다. 규환이 형은 김보라 감독이 정말 대단하다며 무슨 자료를 봤더니 김 감독이 너무 힘들어서 이 작품을 끝으로 다시는 영화를 하지 않을 결심까지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고 국내에서도 인정받아 김보라 감독이 다시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안도를 하고 기뻐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형이 김보라 감독의 새 작품을 기대하는 건 좋은데 지금 여기는 버스 안이고 나는 이제 내려야 하므로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말하고 내가 영화를 본 직후 썼던 벌새 리뷰가 있는데 그걸 카톡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말했다.

버스가 함덕해수욕장 앞에서 내렸다. 카톡으로 규환이 형에게 '여보세요, 저 아까 뒷자리에 앉아 울던 사람인데요'라는 벌새의 리뷰를 보냈다. 여기서 장을 보려면 반드시 하나로마트에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정류장 바로 앞에 식재료 백화점이라는 게 있었다. 들어가 보니 하나로마트보다 훨씬 싱싱한 식재료와 음식들이 가득했다. 나는 생선 센터에 가서 구워 먹을 생선도 사고 계란 등 혼자 지내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조금씩 샀다. 밖으로 나왔더니 내가 보내준 리뷰를 읽은 규환이 형이 '역시 성준이의 글에는 가벼운 무거움이 있어. 좋은 책 기대한다'라는 답을 보내주었다. 11월 말에 촬영을 하고 12월 초까지 편집을 한다고 하니 그때 올라가서 연락을 하면 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규환이 형은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창작곡을 만들고 부르던 홍익대학교 동아리 '뚜라미'의 선배다. 학교 다닐 땐 정말 까마득한 선배였는데 이렇게 말과 생각을 섞을 수 있게 되다니,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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