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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0. 2019

아내는 서울 낮술을, 남편은 제주 밤술을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1


"책이 너무 재미없어서 던져버렸다"라고 쓰려다 보니 전자책은 던지면 깨지는 물건 아닌가. 거짓말을 할 순 없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문체도 스타일도 다 마음에 안 들어서 전자책을 꺼버린 건 사실이었다. 전날 좀 늦게 잤는데도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어떤 신인 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던져버린 것이다. 제목이나 내용을 얘기할 순 없지만 아무튼 글이 너무 궁상맞고 아마추어 같아서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뜻하지 않게 어설픈 소설에 상처를 받은 나는 이럴 때 공인된 작품을 읽아야 해! 하면서 전날 읽기 시작했던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을 다시 꺼냈다. 지난 월요일에 공항에 가기 전 아내와 함께 들렀던 동양서림에서 책꽂이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은 추천의 글이 눈에 띄어 산 책이었다. 이 소설은 어렸을 때 프랑스로 입양되어 극작가로 성장한 문주라는 여자가 얼마 전 임신한 아이의 이름을 '우주'라고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서영의 이메일을 받고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문주는 철로에 버려진 자기를 구해줬던 기관사가 갓난아이를 거두면서 왜 이름을 '문주'라고 지었는지 알고 싶어서 서영, 소율 등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작가들과 함께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작가의 말'을 먼저 읽어보니 이 소설은 여성인권영화제의 표제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고 한다. 자신이 예전에 썼던 <문주>라는 단편에서 시작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 다른 많은 작품과 입양아에 대한 기사 등을 여러 개 참조해서 썼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왜 문주라는 이름에 그렇게 집착하느냐'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그는 '문주는 나의 始原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건 입양이라는 소재로 뼈대를 만들고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주인공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제로 확장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조해진의 견고하고도 사려 깊은 문장들이 잘 쓴 글을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점심때 곶자왈로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30페이지쯤 더 읽었을 때 아내에게서 낮술을 마시고 있는 사진이 날아왔다. 오늘 김 모 작가를 만나 밥을 먹는다고 해서 알고는 있었는데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술로 바꾼 모양이었다. 부러운 마음 반 걱정스러운 마음 반으로 집에 들어와 공처가의 캘리를 하나 썼다. '아내에게서 낮술 하는 사진이 왔는데 조금만 마시라고 얘기하려다 사진을 다시 보니 이미 소주가 두 병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소설을 조금 더 읽다가 뭔가 새로 쓰기로 한 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친구 표문송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마침 내가 머물고 았는 곳에 3년 전부터 내려와 살고 있는 후배가 있으니 그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저녁때 성산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40년 지기 친구가 한 명 있는데 행방이 묘연했다가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 친구와 일차를 하고 성산에서 조인해 이차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뭔가 거창하게 모임이 커지는 것 같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다는 친구를 만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곧 메신저로 먼저 인사를 튼 제주도민 J 씨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이따 자기 차를 타고 성산으로 함께 가자는 얘기였다. 술도 안 마시는 사람의 차를 타고 술집으로 가는 게 미안했지만 오랜만에 문송을 만나고 싶으니 상관없다는 말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심성이 여리고 선한 사람 같았다.

내가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온 J 씨와 인사를 나누면서 성산에 있는 '세영수산'이라는 횟집으로 갔다. J 씨는 기자로 오래 일을 했는데 취미로 하던 음향시스템 관련 일로 직업을 바꾸면서 제주에 일자리가 생겨 3년 전부터 온 가족이 다 내려와 살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기타를 수리하기도 하는데 그 일이 재미있고 또 일주일 내내 힘겹게 하는 일이 아니라서 시간이 비는 평일엔 아내와 함께 오름 산책을 하는 즐거움을 자주 누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횟집으로 들어서자 거의 비슷한 순간 문송과 그의 오랜 친구 D 씨도 도착했다. 문송은 중3인 딸 다인이와 짧은 제주 여행 중이다. 다인이는 매우 예쁘고 귀여운 아이지만 사춘기의 절정답게 모든 게 까칠한데 특히 아빠에게 박하다. 거기에 비하면 아빠인 문송의 짝사랑은 처연할 지경이다. 어떻게 해서 다인을 꼬셔 둘만 제주까지 내려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친구들을 만나 술이나 퍼마시는 아빠가 내일 다인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종달리에서 '술의 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유석 대표가 추천해서 왔다는 얘기를 했더니 횟집 사장님이 반가워하셨다. 맛있는 안주가 뭐가 있나고 물었더니 벵에돔이나 벤자리가 맛있고 지금 방어 철이니까 방어도 괜찮다고 하셨다. 방어는 5만 원이었고 벵에돔은 8만 원이었다. 문송은 방어와 벵에돔을 하나씩 시켰다. 술은 물론 한라산 21도였다. 기본 안주가 와서 한 잔씩 소주를 마시는 동안 내가 주머니에서 '다인에게' 라고 쓴 A4지로 만든 봉투를 꺼내 "다인이 용돈 조금 넣었다"라고 말하며 주었더니 문송이 봉투를 받아 들고는 좋아서 "야, 이런 건 좀 배워."라고 소리를 치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굳이 얼마를 넣었냐고 묻길래 "오 만원이지 얼마야. 내가 얼마를 넣을 수 있겠어?"라고 소심하게 대답을 했다.

정말로 J 씨는 술을 안 마셨고 D 씨는 술을 천천히 마셨다. 잔에 따르자마자 홀깍 홀깍 마셔버리고 새 술을 따르는 사람은 나와 문송뿐이었다. 두 사람이 술을 참 급하게 드시네요,라고 J 씨가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늘 이렇게 마시다가 내가 먼저 쓰러진다고 얘기를 했더니 문송도 맞다고 하면서 자신이 끝까지 안 취하고 남아서 늘 '시체 처리반'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 D 씨의 모험담을 들었고 제주에 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J 씨의 일상 이야기와 과거 추억도 들었다. 문송이 요즘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근황을 물었다. 내가 쓰고 싶은 대로 혼자 열심히 써보고 있다고 했더니 문송은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고 하면서 내가 쓰는 글들이 좋긴 한데 너무 착해서 좀 싱거운 감이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강렬하게 시작하는 글을 써보라고 하길래 그런 것 중 예를 들어보라고 했더니 까뮈의 [이방인] 첫 구절을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니가 광고회사를 너무 오래 다녀서 뭐든 다르거나 특이한 아이디어만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방어를 쳤다.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오해를 하기 딱 좋은 조언이라고 했다. 그는 또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라면서 내가 쓰는 공처가의 캘리도 너무 아내에게 순응하는 내용으로만 구성이 되어 있어서 임팩트가 약하다고 했다. 가끔은 삐딱하게 구는 공처가의 캘리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컨셉이 공처가인데 어떻게 아내에게 삐딱하게 구는 걸 쓸 수가 있느냐고 또 방어를 쳤다. 고깝게 듣지 말라고 했지만 고깝다고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옹졸하게 싸우고 있는 사이에 D 씨가 횟값을 계산하고 사라졌다. 문송과 나는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D 씨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진 채 헤어졌고 나는 또 다시 J 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뻔뻔하게 집까지 무사히 잘 돌아왔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속이 쓰리거나 숙취가 심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메신저가 울리길래 열어보니 문송이 돈을 받고 좋아하는 다인이의 모습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나마 어제 내가 잘한 일은 이거 하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다인이의 천진한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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