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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1. 2019

순자 목욕 사건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2


누구에게나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하루하루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기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소위 '결정적인 하루'라는 게 있다.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에 전쟁이 터지거나, 아내와 살고 있는 집으로 미친 내연녀가 찾아오거나, 남자 대학생이 학교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첼로를 매고 가는 여학생과 부딪혀 둘 다 벌러덩 넘어지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는 그 어떤 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정말 '결정적이지 않은 하루'였다고나 할까. 물론 뭔가 심란하고 심사가 복잡해서 잠을 설치다가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고 다시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세수를 하고 일층의 거실로 내려가(그렇다, 나는 지금 제주도의 이층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비몽사몽 좀비처럼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으니 아주 평범한 시작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전엔 캐비초크를 타 먹고 뭔가를 좀 읽고 쓰고 하다가 졸려서 잠깐 졸았고 어제 읽던 소설책을 마저 읽었을 뿐이다. 점심을 해 먹는 게 귀찮아서 정말 오랜만에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에 가서 멸치고기국수를 먹었는데 오늘따라 국수 맛도 그냥 그랬다. 식당 안엔 YTN24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별다른 뉴스가 없어서 그랬는지 사장님이 리모콘을 들고 채널A로 바꿨으나 거기라고 새삼 특종 뉴스를 건졌을 리가 없었다.

멸치고기국수를 먹고 있는데 전에 얘기했던 부동산에서 집을 잠깐 보러 온다는 카톡이 와서 얼른 다시 숙소로 돌아가 그들을 기다렸다. 12시 반에 도착한다던 부동산 사람들은 정말 12시 반 정각에 초인종을 눌렀고 들어와서는 예의 바르게 방과 거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실내 사진을 몇 장만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더니 정말 몇 장만 스마트폰으로 찍고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깔끔하게 돌아갔다. 혹시라도 "그런데 무슨 사연이 있으시길래 이런 집에서 남자분 혼자 계세요?"라든지 "집주인과는 어떤 사이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약간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에는 ‘세바’라는 동네 카페에 갔는데 지난번처럼 예쁜 여자들이 들어와 돌아다니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지도 않았고 그나마 먼저 와서 도란도란 뭔가 회의를 하던 사람들도 작은 소리로 속삭이다가 이내 일어나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아 멍하니 한쪽 벽을 쳐다보니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사진을 찍었구나 하고 나도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는 오전 내내 작업했던 교정지를 퀵서비스로 보내고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동네 빈집들을 구경하고 있다면서 이제 아무것도 안 하고 들어가 쉴 거라고 했다. 서울에서도 제주에서도 특별한 일은 없는 날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건사고'라는 일본 영화처럼 잔잔하게 하루를 마감해야지 하는 생각에 쓰던 칼럼을 그대로 닫고 분연히 카페를 나섰다. 지난주에 잔돈이 없어서 못 드렸던 천 원까지 합해서 계산하면서 “세바라는 이름이 세바시나 세바퀴와는 관련이 없겠지요?” 라고 사장님에게 물어보려다가 싱거운 놈이란 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개서 이층으로 올라갔더니 창문 쪽이 훤했다. 불이 켜져 있나 해서 밖으로 나가보니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는데 제주는 워낙 풍광이 좋고 하늘이 넓어서 이런 정도로는 오늘의 평범함을 이기지 못했다. 저녁을 해 먹고 식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오늘의 일기를 토닥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다시 해서 고양이 순자가 잠깐 열어놓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가 잡혀 들어와 할 수 없이 목욕을 시켰다고 말하며 웃었다. 물을 싫어하는 순자가 얼떨결에 밖으로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이례적인 사건은 ‘순자의 목욕’뿐이었다. 순자 말고는 모두가 평화로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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