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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3. 2019

마술 같았던 하루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4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정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토요일 새벽에 집에서 453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빈 집에서 혼자 깨어나 더 잘까 말까 고민하면서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는 걸 즐기는 변태는 아니다. 잠을 더 자긴 틀렸다는 생각에 일층으로 내려가 캐비초크를 한 잔 타 마시고 어제 쓰던 글을 손보던 나는 갑자기 쌀을 씻어서 전기압력밥솥에 안쳤다. 그리고 "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라는 요란한 안내 멘트가 밥솥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코르덴 바지와 파타고니아 아우터를 찾아 입었다. 밥이 되는 동안 동백동산 습지라고 쓰여 있는 곶자왈 길을 천천히 산책할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사람이 적지만 토요일 아침이라 길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조그마한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도 적막하기만 했다.

숲길로 접어들기 전에 안내센터 근처에서 로드킬을 당한 개구리 시체를 보았다. 징그럽기보다는 너무 납작하게 길에 붙어 있어서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표본이나 화석처럼 느껴졌다. 원시림이 우거진 숲길은 언제나처럼 좋았다.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있는 검푸른 숲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즉흥적으로 아내에게 보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비추지 않고 걸어가는 숲길만 계속 비추면서 '당신도 나와 함께 이 숲길을 걷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이 동영상을 찍는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오랜 기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는 시간은 내 평생 다시는 갖지 못할 것 같은데, 두렵고 골치 아픈 상황에서도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줘서 고맙다고도 했다. 그 어떤 성과보다도 이런 시간을 내게 선물해 준 당신의 마음이 가장 소중하고 고맙다고 했다. 2분이 좀 넘도록 주절주절 떠들다가 스위치를 끄고 아내에게 카톡으로 "여보, 잘 잤어? 난 숲길 산책 중." "당신한테 보내는 영상편지." 라고 쓰고 동영상을 보냈더니 아내는 "영상 편지는 어딨어?"라고 물어왔다. 숲이 깊어서 텍스트만 가고 동영상은 전송이 안 된 것 같았다. 내가 얼른 숲을 벗어나서 다시 동영상을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쿡쿡 웃었다.

좀 더 올라가다 보니 허공에 나뭇잎 하나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신기해서 가까이 갔더니 나뭇잎이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신기해서 한참을 서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늘 보던 나뭇잎이고 늘 보던  거미줄인데 둘이 합쳐지니 마술처럼 뜻밖의 그림이 생겨나는구나 생각했다.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창조활동도 결국 이런 원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조금만 걷다가 얼른 돌아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숲이 좋아서 그런지 뭔가에 홀린 듯 자꾸자꾸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더 걷다가 겨우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거미줄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중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와 <새벽의 방문자들>을 읽었다. 아, 이 작가 너무나 반짝반짝하고 능수능란하게 글을 잘 쓴다. 두 편 다 섹스가 살짝 가미된 작품들이었데 전혀 과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21세기 도시'라는 시제와 장소에 살짝 가려져 있던 인간의 속성들을 잘 들춰낸다. 난 정세랑이 데뷰작 <드림 드림 드림>부터 <피프티 피플>에 이르기까지 섹스를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장류진도 그런 소설가인 듯해서 믿음직스럽고 좋다.

스카치테이프인지 연필 깎는 칼인지를 찾느라 거실 서랍을 열었다가 모나미 매직펜 몇 개를 발견했다. 어, 매직이 있네 하다가 'Magic'이면 마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빨간색 매직펜으로  공처가의 캘리를 하나 썼다. ‘스카치테이프를 찾으려고 거실 서랍을 열었다가 매직펜을 발견했는데 평범한 매직펜도 생각하기에 따라 마술이 될 수 있으니 나와 아내에게도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오후에 소설가 김탁환 선생과 함께 '달문의 길'을 따라 걸었던 아내가 전화를 하더니 저녁에 배가 고픈데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고 화를 냈다. 나는 어떡하냐고, 그냥 집에 가지 말고 어디 가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라고 얘기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25일까지 써서 내야 하는 칼럼 몇 편을 손보다가 딱 십 분만 걷다가 들어와야지 하고 어둑한 동네 길을 걷고 있는데 다시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화문에서 '삼청동 기사'까지 걸어가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쯤 지나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화요을 반 병쯤 마셨다고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더니 당신 없을 때 무리 좀 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쯤 지나 또 전화가 왔다. 화요 반 병 남은 걸 마저 마시려고 안주를 하나 더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제주 일기를 쓰고 있는데 마침 냉장고에 한라산 17도와 '비비고 한입 떡갈비'가 있으니 그걸로 가볍게 한 잔 마시면서 일기를 마저 쓰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술을 다 마시면 '타다'를 불러서 집으로 들어갈 거라고 했다. 들어가면 전화를 다시 하라고 하고 끊었다. 한라산 17도가 반 병쯤 남았다. 지금 아내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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