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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6. 2019

특별하지 않아 더 특별했던 2019년 11월 26일

아내 없이 제주 한 달 살기 17


예전에 [24]라는 미드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CTU라는 대 테러 부서에 근무하는 최정예 요원 잭 바우어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로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리얼타임으로 24시간을 한 시간씩 끊어 24부가 다 방영되면  한 시즌이 마감되는 방식이었다. 아랍 출신의 연기자들을 테러리스트로 자주 출연시켜 욕을 먹던 작품이기도 했다. 당연히 전쟁이나 애국심 등을 좋아하는 FOX-TV의 제작물이었는데 난생처음 만나는 신박한 형식과 강렬한 액션 덕분에 중독된 시청자들이 많았고 CTU 본부 세트는 이후 국내 첩보 드라마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나도 시즌 4까지는 이 드라마의 열혈 팬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매회 본부 상황실에 앉아 전화와 인터넷으로 잭을 도와주던 클로이라는 뚱한 표정의 여배우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에 나왔을 땐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영화 [스탠 바이 미]를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 도널드 서덜랜드나 다른 가족들 그늘에 가려 늘 시시한 역만 맡았던 키퍼 서덜랜드는 연기자보다는 줄리아 로버츠의 전 약혼자로 더 유명세를 치렀는데 마침내  이 드라마로 생애 최고의 캐릭터를 만났고 내친김에 에미상까지 탔다. 인기 드라마다 보니 한 시즌이 끝나면 열혈 팬들 사이에선 다음 시즌에 대한 각종 스포일러가 난무했다. 그중에서 제일 웃겼던 건 시즌4인가에서 다른 사람 대신 중국 공산당 기관원들에게 인질로 잡혀간 잭 바우어가 '기절했다가 깨보니 24시간이 통째로 지나갔더라'는 썰이었다. 그러니까 다음 시즌은 잭이 24시간 내내 잠만 잔다, 라는 황당한 스포일러였다.

제주도에 온 첫날부터 일기를 써왔다. 어느덧 스무하루가 지났다. 혼자 지내는 일상이라 늘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종일 혼자 뒹굴다가도 저녁이 되어 오늘 하루는 어떻게 지냈나 되짚어 보며 A4지 위에 단어 몇 개를 뿌려 놓으면 신기하게도 단어들끼리 뭉쳐 재잘거리며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보통은 밤 여덟 시나 아홉 시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오늘은 괜히 일찍 일기를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24] 생각이 났다. 나도 그때의 가짜 스포일러처럼 오늘은 24시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눙을 쳐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오늘 아침에 노트북이 안 켜져서 당황하기도 했고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점심때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 '세바'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그 얘기를 토대로 '서울에 가면 아내가 있다'라는 공처가의 캘리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뭐 특별한 일인가.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어제 사온 식료품 중 풀무원 얇은피만두나 굽고 한라산이나 따서 한 병 마시고 자야겠다. 사실은 어젯밤 늦게 갑자기 근심 걱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새벽 세 시까지 잠을 설쳤다. 그래서 책도 글도 다 귀찮은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녁 8시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자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할 수 없이 술을 조금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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