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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7. 2019

심란해도 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8

아침부터 어떤 공무원과의 통화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대개 그렇듯이 그런 전화는 돈과 관계된 내용이었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대화는 절대적으로 내게 불리했다. 서울에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대면을 한 채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따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오전 내내 예전에 썼던 글들을 갈무리하다가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뚫고 근처 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와 그 공무원과 통화를 했다. 그 내용을 여기다 말할 순 없다. 다만 젊은 사람인데도 그 정도로 생각이 꽉 막혀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고 나중에는 나를 약간 놀리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밥은 입으로 들어갔고 비 오는 산책길은 아름다웠다. 공처가의 캘리도 하나 썼다. 영화 [첨밀밀]에서 장만옥이 증지위에게 "쥐 말고는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다"라고 말한 장면을 들먹이면서 '아내 말고는 무서운 게 없다'라는 캘리를 썼더니 아내가 당신 때문에 내가 점점 무서운 아내가 되어가고 있다고 투덜댔다.

저녁에 그 공무원과 전화 두 통을 더 하고 혼자 분을 삭인 뒤,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는 어떤 분의 관대한 도움 덕분에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끓어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이런 일에 서툰 나 때문에 화가 났다. 서울에서 가져온 책들 중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를 펴서 아무 데나 펼쳤는데 마침 <멸종에 대하여>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글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구는 "핵은 액체 철로 이뤄져 있으며 놀랍도록 얇은 껍질에 대기와 대양, 산맥과 심해의 해구, 미생물과 인간이 모두 담겨 있는 자그만 돌덩어리"다(칼 세이건, [지구의 속삭임]) 우주에는 1000억 개 넘는 은하가 있고, 은하마다 수천억 개의 별과 행성들이 딸려 있다. 지구는 내행성계에 속하는 수성, 금성, 달, 소행성들과 함께 태양 주변을 돈다. 수많은 생명 종들을 품어 안은 지구는 우주의 은하들과 그 은하가 품은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은 별들 중 하나에 속한다. 지구는 식물과 동물들을 품고 이 광막한 바다에서 작고 창백한 점으로 떠 있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이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잡지 <상상>에 실렸던 박완서 선생의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아들을 쇠파이프로 잃은 어머니가 심란할 때마다 외는 '은하계 주문' 때문이었다.

"은하계는 태양계를 포함한 무수한 항성과 별의 무리, 태양계의 촛점인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빛으로 약 오백 초...광년은 빛이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의 단위, 구조사천육백칠십 킬로미터."
우리가 아무리 안달복달 살아도 그건 (신의 눈까지 갈 것도 없이) 인공위성이나 로켓 타고 하늘 위로 몇 킬로미터만 올라가 봐도 이게 얼마나 웃기고 하찮은 짓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문득 극작가 박근형 작가의 말도 생각났다. 예전에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두 번째 보았을 땐가, 연극이 끝나고 어쩌다가 배우들과의 술자리에 합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회식 장소에 늦게 도착한 박근형 작가는 내 옆에 앉은, 아직 군대도 안 간 스물두 살쯤 먹은 연극 지망생 청년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뭐든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아'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땐 어린 후배에게 왜 저런 가혹한 말을 하나 싶었는데 후에 다시 생각을 해 보니 이거야 말로 막돼먹었지만 아주 진실되고 멋진 충고인 거라. 뭐든 안 되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러다 뭐라도 하나 되면 정말 기뻐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중에 내가 죽을 때쯤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덧없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해보는, 비 오는 제주의 깜깜한 저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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