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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8. 2019

제주에서 칼럼 연재를 시작하다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19

제주도에서 칼럼 연재를 시작하다>
1.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 위에 앉아 A4지 한 장을 깔아 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회사 다닐 때도 책상에 앉으면 하던 버릇인데, 하얀 종이를 깔아 놓으면 마치 밤새 눈 내린 마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촌스러워서 그런지 아직도 뭔가 생각을 할 때는 연필이나 볼펜으로 끄적끄적하는 버릇이 있다. 제주에 온 넷째 날에 그렇게 문방구를 찾아 헤맸던 이유도 사실은 A4지를 확보하고 싶어서였다. 아내가 쓰던 걸 훔쳐 온 보라색 파버카스텔 연필을 들고 눈 오는 생각을 하다가 그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문장을 다듬고 새로 종이를 한 장 더 꺼내서 다시 깨끗하게 써보았다. 이 글은 뭔가 써보려 했던 게 게 아니고 그냥 A4지를 식탁에 깔아놨을 때의 느낌을 잊지 않으려 메모한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나서 처음 낙서처럼 썼던 글씨와 비교를 해보니 별 건 아니지만 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보이는 것 같아서 괜히 재밌었다.

<하얀 아침>

아침에 일어나
식탁 위에 A4지 한 장을
깔아놓으면
밤새 내린 눈을
밟는 기분이 된다.
이대로 한 시간만
앉아 있으면
내 마음속에도
따뜻한 눈이 내릴 것이다.

2.
칼럼을 연재하기로 했다. 이번 주부터 북이오(buk.io)의 '프리즘'이라는 서비스 채널을 통해 카피라이터 출신의 글쓰기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미술, 과학, 에세이 등 각 분야에서 필력을 자랑하는 멋진 작가님들도 함께 글을 쓸 예정인데 나는 20년 차 카피라이터(연차가 너무 많아 창피해서 좀 줄였다)가 알려주는 ‘여운이 길면서도 짧은 글 쓰기 팁’ - [글은 짧게, 여운은 길게]라는 제목으로 매주 짧은글 쓰기에 대한 내 생각들을 풀어 보기로 했다. 총 30회 연재 예정이고 먼저 보냈던 원고 세 편이 한꺼번에 채널에 올라왔다. 다음 주부터 매주 일요일이 마감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빨간 벽돌로 지어진 1층짜리 커피숍에 갔다. 이 집은 며칠 전 한 번 가서 커피만 텀블러에 담아왔던 곳인데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고 모든 테이블이 좌식이다. 당연히 들어갈 땐 신발을 벗어야 한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노트북을 꺼내 원고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 뒤에 앉은 어떤 여자 분이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말끝마다 "개망했어!"라고 외쳤다. "알리오올리오가 나왔는데, 맛이 진짜. 와, 개망했어...혼자 돌아다니다 개망한 거지 뭐." 이런 식이었다. 40대 후반쯤 되는 분이 그런 발랄한 언어를 구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좀 민망하고 처량했다. 나도 어디 가서 말조심을 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북이오 대표님에게서 메일이 왔다. 프리즘에 글들이 다 올라갔으니 필자들이 페이스북 등으로 공유를 해주면 새로운 플랫폼 안착에 더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마침 와이파이가 빵빵한 카페 안에 있을 때 이런 메일을 발견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장님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더 부탁하고 내가 쓴 칼럼들을 정성껏 공유했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내가 내 글을 홍보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는가, 하는 실용적이 욕구와 떳떳함으로 공유 버튼을 아낌없이 팍팍 눌렀다.

오후 세 시가 가까워지자 배도 고프고 해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며 얼마냐고 물었더니 4,000원이라고 했다. 에스프레소까지 마셨는데 왜 가격이 그 모양이냐고 물으니 에스프레소나 추가 샷은 서비스로 모시고 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처음부터 젊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선하게 보인다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진짜 천사 같을 줄이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커피숍을 나왔다.

3.
저녁에 샤워를 하고 플랭크를 1분 간 한 뒤 식탁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아내의 친구이자 나의 지인이기도 한 분께서 카톡으로 내 칼럼의 오자를 찾아 보내주셨다. "형부 쓰신 글에서 처음으로 오타를 발견하고 ㅎㅎ 형부도 사람이셨군요 하면서 카톡 보냅니다.^^" 라는 글을 보내왔길래 "하하. 오타 생산 킹이죠.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답장을 보냈다. 사소한 관심이지만 내 글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본 뒤  보내준 걸 알기에 정말 고마웠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니 칼럼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은 것 같아 약간 기뻤다.

점심을 너무 늦게 먹어서 밥 생각이 안 나길래 저녁 대신 캔맥주를 하나 꺼내 마시고 있는데 같은 프로젝트 필자 중 한 분께서 메시지를 주셨다. 다른 분이 오자 지적한 걸 보니 자신도 용기를 내서 얘기한다고 하면서 필립 로스가 아니라 척 클로스가 아니냐고 물으셨다. 아마 내가 쓴 글 내용 중에 '아마추어는 영감을 기다리지만 우리는 그냥 일 하러 나간다' 라고 쓴 부분을 얘기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필립 로스도 같은 얘기를 했다고 들었는데요...저는 정영목 번역가의 글을 읽은 것 같은데, 내일 인터넷을 찾아보고 고치겠습니다." 라고 답장을 드렸다. 필자께서는 미안하다고 하시며 자기가 잘못 안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올린 칼럼을 잘 보고 있으며 심지어 오늘 자신의 친구가 내 글을 읽고는 '자기도 글을 잘 쓰고 싶어졌다'고 말하더라는 기쁜 소감까지 전해 주셨다.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바라던 게 바로 그거였는데 말이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에서 이 문장을 쓰면서 ‘이건 척 클로스가 한 말’이라고 본문에 슬쩍 밝혔다고 한다. 메시지를 주신 필자님의 지적이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긴 하다. 필립 로스로 남겨 두어야 하나 아니면 척 클로스라고 고쳐야 하나 약간 고민이다.

4.
오늘은 안산에이스병원의 독서클럽 '성장판' 모임이 있는 날이다. 지난달엔 내가 가서 정혜신 쌤의 [당신이 옳다]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아내가 가서 '아무튼' 시리즈 얘기를 한다. 나는 모임이 끝날 시간쯤 되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다시 전화를 하니 "어, 끝나고 지금 닭갈비를 먹어. 너무 맛있어. 이따 전화할게." 하고는 바로 끊었다. 아무래도 아내는 남편보다 닭갈비가 더 좋은 모양이다, 라고 섭섭해하고 있는데 저녁을 다 먹은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독서모임이 매우 재미있었고 회원들이 써 온 세줄 평도 다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내 칼럼들의 리드 부분이 너무 긴 느낌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다음부터는 그 점에 더욱 유의하면서 글을 써보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고잔역에서 전철을 탔으니 아직도 성북동을 행해 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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