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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9. 2019

아내와 지방 호텔들을 전전하다

렌터카 타고 전국을 누비던 어느 부부의 좌충우돌 취재기

회사를 그만둔 올 가을, 아내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전국의 스마트팜 농가를 돌아다니며 취재하고 그걸 글로 써서 보고서 같은 책을 한 권 만드는 일이었다. 문제는 10년 넘게 운전을 전혀 안 하던 내가 차를 직접 몰고 다니며 농부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망설이면 기회를 놓치는 게 된다. 나는 두말없이 찬성을 했고 아내는 아는(아내는 참 아는 사람이 참 많다) 렌터카 사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차를 한 대 계약했다. 티볼리 디젤이었다. 티볼리는 소형차 중에서는 그나마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였고 디젤을 빌린 이유는 당시 그 회사에 티볼리 휘발유 차는 몽땅 대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쯤 차를 빌려 운전연습 삼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를 빌린 지 이틀 만에 성수동 빵공장에 갔다가 주차 요원과 시비가 붙고 타이어가 찢어지는 바람에 난리를 쳤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었고 사정을 들은 렌터카 회사 사장님이 타이어 값 6만 원 중 3만 원을 보조해 주는 바람에 차와 나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괜찮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카톡 메신저에 남겨서 큰 위로를 주었다.

스마트팜은 농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농작물이나 가축의 생육 환경을 최적으로 유지하는 농업 시설을 말한다. 스마트팜의 효용으로 높은 생산성과 편의성이 꼽힌다. 그래서 요즘은 공대 출신이 농사를 더 잘 짓는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식물공장, 즉 수직농장(Vertical Farm)은 컨테이너 등 인공구조물 내에 빛, 공기, 양분 등을 인공적으로 조절해 날씨, 계절과 상관없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시설이다. 요즘은 농사라고 하면 곧장 '하우스'를 연상하면 된다. 그게 비닐하우스든 유리온실이든 제대로 성과를 내려면 예전처럼 노지 농사로는 어려운 실정이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정보통신 관련 일에 종사하다가 몸이 안 좋아져서 요양차 내려온 사람이 마을 사람들 일을 도와주면서 연매출 6억 원의 스마트 파머로 변신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 파머들은 최소한 종잣돈이 5억 정도는 있어야 경영이 가능한 부농들이요 사장님들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던 스마트팜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취재를 다녔다. 아내가 섭외 및 인터뷰 일정 조정, 필요한 도표와 통계, 수치 등을 모두 맡았고 나는 인터뷰와 메인 기사 작성을 진행하기로 한 분업체제였다. 이는 아내가 기자 출신의 기획자고 나는 카피라이터 출신이라 가능한 조합이었다.

자동차 바퀴가 빠지자 괜히 뭔가 해보는 척 땅바닥에 엎드린 남편. 결국 보험회사 직원이 올 때까지 아무 것도 못했다.


파주를 시작으로 강화,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등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의 운전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아직 초보라서 실수의 연발이기도 했다. 아내는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해주는데도 고속도로 출구를 못 찾아 수십 킬로미터를 더 돌아갈 때마다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북 김제에서는 취재를 마치고 나오다가 농가 바로 앞에 있는 배수로에 바퀴가 빠져 긴급하게 보험사를 부르기도 했다. 바퀴가 빠진 내 차를 끌어내 주려다가 농부의 차까지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그 보험사 직원은 차를 두 대나 건져내야 했다. 농부 말로는 그 배수로에 일 년에 한 번 정도 바퀴를 빠뜨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엔 그게 나였다고 하며 웃었다.

운전을 하는 바람에 즐거운 일도 많았다. 일단 그동안 차가 없어서 포기했던 '맛집'들을 조금 더 손쉽게 찾아다닐 수 있었다. 광주나 남원 등에서 만났던 맛집들을 잊을 수 없다. 지방의 호텔들은 아내가 도맡아 예약을 하며 동선을 짰는데 '야놀자'앱이 편리하고 할인도 많아 최고라고 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드라이브 인 호텔'에 가보기도 했다. 쫙쫙 갈라진 커튼이 너울대는 입구로 들어가면 개인 주차공간이 나오고 차를 대면 저절로 주차장 문이 닫혀서 투숙객들이 차에서 내린 뒤에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곧장 방으로 향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기계 작동이 서툰 우리 커플은 주차장 안에서 인터폰으로 여직원과 여러 번 통화를 해야 했다. 대부분 신분 노출을 꺼리고 대화를 피하는 투숙객들 사이에서 우리 부부는 좀 유별난 사람들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호텔의 욕실 또한 잊을 수 없었다. 욕실 한쪽 유리창을 통해 침대에서도 욕실 안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방의 불을 끄면 욕실은 무대로 변했다.  아내는 기겁을 하며 요즘 욕실들이 이상하다고, 민망하게 방에서 안이 다 보인다는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더니 "그게요...부부라서 민망한 거예요."라는 페친의 답글에 둘 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매일매일이 강행군이었다. 원래는 취재를 하고 숙소로 가면 그날 저녁에 기사 초고를 마무리하는 게 계획이었지만 막상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골짜기까지 가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대로 녹초가 되었다. 인터뷰가 길고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서 녹취를 했는데 나중에 녹취를 푸는 것도 엄청난 노동력과 주의를 요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내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니 공부를 안 한 티가 너무 났다. 스마트팜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인생 공부를 게을리한 게 내 발음과 억양과 자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맨날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고 세상 물정엔 담을 쌓은 채 나태하게 살아온 것이다. 뼈저린 반성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스마트팜은 과학과 효율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하는 세계였다. 생산성으로 모든 게 평가되는 세상에서 내가 정 붙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기사도 인간적이거나 개인적인 냄새를 조금이라도 풍기면 건조하고 명료하게 다시 고쳐달라는 주문이 왔다. 어쩌면 아직 정신 못 차린 투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냥 일이라 생각하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게 일하는 자의 기본자세임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매일매일 운전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조수석에서 내비게이션을 읽어주며 노심초사하던 아내도 나중엔 코를 골며 자는 경지에 이르렀다. 재미있는 건 내비게이션의 안내 멘트였다. 한참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뜨는 '경노내유고'는 정말 황당한 문구였다. 이게 뭘까 계속 궁금해하며 유추해 보니 '당신이 경유하고 있는 길 안에 사고가 있으니 돌아가는 게 어때?'라는 경고 문구였다. 기가 막혔다. 이렇게 어려운 한자어를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한글로 쓰다니. 하지만 "잠시 후 터널 안으로 진입하겠습니다. 기존 차로를 유지하십시오."라는 안내 멘트에서는 뭔가 내가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온 건 아니라고 인정해 주는 말 같아서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운전을 하는 동안엔 당연히 통화도 메신저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전라도의 고속도로를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계속 달리고 있는데 연속으로 카톡이 울렸다. 그날은 고등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는 날인데 나는 미리 지방 출장 때문에 못 나간다고 언질을 해둔 상태였다. 알람을 꺼달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아내에게 카톡 내용을 좀 읽어달라고 했다.

성준 : 여보, 카톡 좀 확인해줘.
혜자 : 영일 씨가 끝나는 대로 빨리 가겠대.
성준 : 난 못 간다고 얘기해놨어.
혜자 : 대명 씨가 조금 늦겠대.

성준 : ...
혜자 : 정완 씨가 먼저 도착하거든 3만 9천 원짜리 디너 시키면 된대.
성준 : 횟집이구나.
혜자 : 오늘 정치 얘기하는 놈은 입을 찢을 거래. ㅋㅋㅋ
성준 : ㅋㅋㅋ

혜자 : 영일 씨가 공, 술 ,떡, 녀, 요런 야그만 하재.
성준 : 아이구, 새끼들.
혜자 : 정완 씨가 그중에 질루 좋은 건 떡이여~ㅋㅋ
성준 : ...

혜자 : 대명 씨가 아이고, 난 이제 자지로 오줌만 눌 거야. ㅋㅋㅋ
성준 : 햐. 새끼들.
혜자 : 한 가지만 해야지. 그것도 잘 안 되는데.
성준 : 여보.
혜자 : 대명 씨가 나두 나두...니들은 오줌은 잘 나오나 보다.

성준 : 여보, 여보.
혜자 : 응?
성준 : 그만 읽어도 돼.
혜자 : 응.

고등학교 동창 놈들이 메신저로 오줌 누는 얘기나 나누고 있는 걸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리자니 처량하고 슬펐다. 그래도 이놈들이 다 나보다 나은 인간들인데...나는 어쩌자고 동창회도 못 가고 이렇게 고속도로를 헤매고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내비게이션이 또 다른 멘트를 던졌다. “300미터 앞, 불량적재차량 단속구간입니다..." 불량적재 단속이라니. 이 차 안에도 불량한 인생이 하나 적재되어 있는데...괜찮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물론 아내에게 이런 생각까지 말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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