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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9. 2019

아무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20

아내가 중이염에 걸렸단다. 그녀는 뭔가 스트레스가 많거나 피곤하면 귀에 문제가 생긴다. 나는 이건 염증이니까 귀찮더라도 꼭 병원에 들러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침에 나와 통화를 한 아내가 카톡으로 순자 사진을 보내왔다. 순자의 심각한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아내 말에 의하면 그래도 이름을 불렀더니 웬일로 눈을 맞춰준 사진이란다. 순자는 다른 집 고양이들처럼 얇실하게 예쁘지도 않고 표정은 늘 뚱하다. 털도 까맣고 전체적으로 동그래서 사진을 찍어도 잘 안 나온다. 여러 가지로 단점(?)이 많은 고양이지만 그래도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내가 계속 집을 비우는 상황에서는 아내에게 순자라는 존재는 더욱 위로가 될 것이다. 나는 아침부터 순자가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순자 사진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다.

지난가을 아내와 함께 전국의 스마트팜 농장들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던 내용이 생각나서 렌터카를 빌리던 얘기부터 기억을 더듬어 써보았다. 힘든 취재여행이었지만 아내와 함께 팀워크를 이루어 뭔가를 하는 게 즐겁기도 한 시간들이었다. 아마 내 평생 이렇게 운전을 많이 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티볼리 디젤을 몰고 다니며 산골짜기 농가들을 찾아다녔고 전국의 맛집도 수시로 들렀다. 하루는 킬킬거리며 드라이브 인 호텔에 가서 묵기도 했다. 오전 내내 그때의 추억을 더듬어 글을 완성하고 '아내와 지방 호텔들을 전전하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북이오에 새로 연재하기로 한 '글은 짧게, 여운은 길게' 칼럼에 쓸 단서들이 생각날 때마다 A4지에 볼펜으로 짧게 메모를 했다. 이런 식으로 메모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계속해서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글들을 정리하다가 짧게 절망했다. 자기가 쓴 글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어떤 때는 그럴듯해 보이다가도 조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면 다 쓸 데 없는 이야기처럼 허무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어렸을 때 [광장]의 최인훈 작가가 자신이 쓴 글이 소피스트케이션처럼 느껴질 때가 가장 괴롭다고 한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회색인]을 읽고 지식인 소설이라는 걸 처음 접했는데 선생은 늘 그렇게 고도로 관념적인 소설들을 평생 썼던 분이니 더 자주, 오랫동안 그런 의심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무엇일까, 라는 도저히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을 품은 채 이것저것을 뒤지다가 좀 가볍긴 하지만 요즘 독자들이 많이 읽는 '아무튼 시리즈' 중 한 권을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문장력이 좋다고 소문난 류은숙의 [아무튼, 피트니스]였다. 글쓴이는 인권운동을 한 30년 했던 사람인데 엉뚱하게 피트니스를 소재로 글을 썼다. 자신의 말로는 "운동(movement)을 한 지 25년이 넘었는데 쉰이 될 무렵 여러 군데가 아프고 나서부터 운동(exercise)으로 피트니스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맨 처음 새벽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깨 병원으로 간 뒤 헬스클럽에서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게 된 이야기부터 '운동 문외한'이었던 나이 든 여성이 어떻게 피트니스 신봉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쉽고 재미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먹는 것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더 공감이 갔다. 예를 들어

나의 목적은 뭘까, 친구들은 입 모아 만장일치로 말했다. "계속 마시기 위해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스무 살 때부터 마셔 온 인생, 인생에서 이걸 지워버리고 산다면 그런 삶은 내게 건강한 삶이 아니다. 기억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같이 마신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게 내 삶이다. 내가 그들을 기억하며 만든 유대가 내 삶이다. 맞다. 계속 마시기 위해선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런 식이다. 류은숙은 50대의 비혼 여성으로서 살아가던 평범한 인권운동가가 뒤늦게 피트니스를 통해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 눈뜨게 되는 과정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서술하는데 곳곳에 인문학적 성찰까지 잘 스며 있어서 다 읽고 나니 좋은 글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역시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좋은 글을 읽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저녁에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내일 김장을 위해 무채를 썰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일을 많이 해놓아야 내일 본 게임이 쉽게 끝난다고 했다. 아내의 성실한 기질을 잘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성북동 꼭대기 집에서 혼자 낑낑대고 일을 하고 있을 아내를 상상하니 더 마음이 무거웠다. 내일은 토요일이자 제주에서 지내는 마지막 주말이다. 그동안 서울에 한 번 올라갔던 것 말고 제주에서는 딱 두 번 사람들과 어울리고 계속 혼자 지내왔다. 늘 그렇지만 혼자 지내는 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이제 서울로 올라갈 날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다단계로 심란해진다. 길든 짧든 원래 여행의 끝물은 다 이렇다. 그리고 원래 이런 건 극복이 잘 안 된다. 단편소설이나 하나 더 읽고 일찍 자야겠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식탁에 A4지를 펴면 또 뭔가가 떠오르겠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다시 떠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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