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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30. 2019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날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21

"요즘 사람들은 정말 돈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
"어느덧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사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된 것은 현대인들만이 아니다. 로마시대의 탐정을 다룬 스티븐 세일러의 추리소설 [로마 서브 로사]를 읽어보면 변호사 키케로가 고용한 탐정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고르디아누스가 계약을 체결한 후 "아, 드디어 계약금으로 무너진 뒷담장을 보수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 몸종으로 쓸 여자 노예도 한 명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정의감이나 의리,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화폐가 생겨난 이후로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도 결국은 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지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아침에 돈 걱정을 하면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눈을 떴는데 머릿속에 '비상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돈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왜 그런 단어가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토요일 아침을 불길하게 만든 돈 걱정을 얼른 털어내 버리려고 비상금, 상금, 돈카츠, 돈텔마마, 이차돈...하며 말장난을 치다가 결국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말을 비틀어 '비포 더 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낙서를 만들어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다.

아침에 식탁에 앉아 글들을 좀 정리하다가 두부된장국을 만들어 아침을 차려 먹고 곶자왈로 산책을 나갔다. 오늘은 깊게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이라는 소설집에 실린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라는 소설을 읽었다.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아직 하지 않은 커플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신랑 아버지에게 전기장판을 가져다 주려 '물나들이'라는 곳으로 가면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단편이다. 김세희는 [항구의 사랑]이라는 장편을 읽고 싶었지만 제주에 와서 그걸 읽으면 너무 시간을 빼앗길 것 같아 단편집을 먼저 산 작가다. 다큐 영화를 찍는 선배를 찾아간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야>와 옥시 피해자 이야기를 모티브로 쓴 것 같은 표제작 <가만한 나날>, 그리고 첫 직장에서 만난 팀장 얘기를 다룬 <드림팀>을 읽었는데 좀 문청 스타일이긴 하지만 구조가 단단하고 문장도 좋다. 산에 가서는 리디북스 디바이스 대신 스마트폰으로 읽었는데 소설의 경우에는 스마트폰의 폰트들이 더 크고 선명해서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독서 습관을 들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아내가 '전 옆집 총각'인 동현, 여행작가 박재희 선생 등과 함께 한창 김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방해가 될까 봐 전화도 생략한 채 바로 집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근처에 있는 8,000원짜리 한식뷔페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돼지고기와 쌈채소, 가정식 반찬 등을 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인데 며칠 전에 너무 늦은 시간에 갔더니 반찬들이 거의 다 떨어져 낭패를 보았던 곳이다. 오늘은 한 시가 좀 넘는 시간에 갔더니 나 말고 두 사람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내 앞쪽에 있는 두 남자 중 한 사람은 중년이고 한 사람은 청년인데 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중년 남자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밥을 먹고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이럴 거면 왜 같이 밥을 먹으러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같은 직장에서 발행한 식권을 써야 하는 사이라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도 혼자서 밥을 꾸역꾸역 먹던 나는 괜히 목이 메어 뜨거운 숭늉을 한 잔 떠와 천천히 마시고는 아줌마들께 인사를 하고 나왔다. 서글픈 점심시간이었다.

오후에 예전에 썼던 글을 좀 더 재미있게 고쳐보려고 끙끙대고 있는데 카피라이터 후배 서덕 씨에게서 카톡 문자가 왔다. 예전에 같이 일 할 때 말을 놓지 못해 지금도 존대를 하는 후배인데 너무 오랜만이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최근에 에세이를 하나 출간했다는 것이었다. 나와 같이 일할 때의 기억이 좋아서 그런지 왠지 책을 한 권 보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다니 고마울 뿐이었다.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라고 했다. 회사를 쉬면서 느꼈던 것들을 담은 책이라고 했다. 아마도 서덕 씨는 번아웃되었다가 쉬면서 이 책을 쓰고 다시 회사로 돌아간 것 모양이다. 지금은 엘리스퀘어에  있다고 했다. 나도 지금 뭔가 원고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책이 나오면 꼭 알려 달라고 인사를 했다.

김장을 다 마친 아내가 저녁에 전화를 했다. 어제 많은 일을 해놔서 오늘을 비교적 일찍 끝났는데, 역시 동현이 와서 많은 일을 해줬고 '파란대문집' 주인 정옥 씨도 와서 애를 썼다고 한다. 일단 김장을 열심히 했으니 이제 김치가 맛이 있건 없건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 하길래 알았다고 대답했다. 중이염에 시달리는 아내는 일찍 누워서 TV 뉴스를 보고 나는 식탁에 앉아 일기를 쓴다. 전에 세월호 포스터를 같이 만들었던 이용택 차장이 카톡으로 주소를 물어왔다. 작년처럼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에 내가 쓴 글을 너무 잘 읽었다고 인사를 하길래 어떤 글이 재미있었냐고 물었더니 제목이 생각이 안 난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재밌게 읽었는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나다니, 글을 잘못 썼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뒤늦게 생각났다고 카톡이 왔다. '짧게 쓰고 싶으면 길게 생각하라'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더 열심히 써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중이염에 걸린 아내는 서울에서 김장을 했고 제주에서 혼자 산책하고 밥을 먹으며 아무도 안 만난 남편은 전화와 메신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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