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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01. 2019

커피와 소설책만 있었던 일요일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22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오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의 비 오는 소리는 고즈녁해서 참 좋다. 나는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어서 우산을 쓰고 중산간 도로로 나가 커피를 사 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문을 연 가게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 빨간 벽돌 건물 커피집인 '93Brew'의 현관문이 열려 있어서 청소를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드립 커피를 얻어왔다. 아내는 중이염 때문에 아직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한다. 월요일에 다른 병원으로 한 번 가보라고 했다. 성북동에서 오래도록 했다는 그 나이 든 의사분이 있는 '유사 종합병원'은 문진만 하고 귀에 약도 발라주지 않았다고 하니까.

오전엔 어제부터 끙끙대던 원고 하나를 고쳤는데 제법 만족스럽게 나와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가 예전에 아내가 술에 취해 들어왔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길래 그 얘기를 가지고도 설렁설렁 글을 하나 써보기로 했다. 술 많이 마신 걸 다음 날 회사 가서 자랑하는 인간들의 속내는 알고 보면 '내가 어제 나를 이렇게 괴롭혔으니 제발 좀 알아 달라'는 죄의식 해소 차원의 행동이라는 것을 예전에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서였다.

만약에 술과 담배를 하면 할수록 몸이 점점 나고 좋아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가지고 간단한 다이얼로그 상황으로 만들어 보았다. 두 편으로 나누어 담배 편의 주인공은 나로 하고 술 편의 주인공은 아내를 썼는데, 술 편에서 실연을 당해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아내를 꾸며내다 보니 그녀의 술 취한 모습이 진짜로 막 떠올라서 혼자 쿡쿡 웃으며 놀았다. 너무 오래 혼자 있다 보니까 이렇게 미친놈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썼다.

오후에는 정명섭 작가의 [유품정리사] - '연꽃 죽음의 비밀'이라는 추리소설을 하나 샀다. 정명섭 작가는 조영주 작가 북콘서트 할 때 '카페 홈즈'에서도 보았던 분인데 얼마 전 페이스북 담벼락에 이 작품으로 드라마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 올라왔길래 정말 축하드린다고 댓글을 달았었다. 갑자기 그게 기억나서 리디북스에 들어가 책을 사고는 바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죽은 사람들이 남긴 유품들을 가족 대신 정리해 주는 일본의 '유품 정리사'라는 직업을 접하고 바로 '조선'을 떠올렸다고 한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인 조선에서는 특히 여성, 아이, 노비들이 억울하게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조 시대 갑자기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부승지 사망 사건을 기본으로 하고 딸인 화연이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면서 유품정리사로 일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화연 곁에는 그녀를 돕는 우포도청 군관 완희가 있는데 둘 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 이야기가 활기차고 귀엽기도 하다. 소설은 각각의 사건들이 챕터로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캐릭터들이 점점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구성이라 TV 드라마로도 아주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 소설은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얘기를 먼저 듣고 읽는 거라 더욱 그런 상황들을 상상하면서 읽게 되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내가 잠깐 동네 산책을 하겠다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성북동콩집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서울에도 비가 오고 있었다. 아내는 내년에 딱 두 가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마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그 두 가지가 뭔지는 아직 밝힐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서울 올라가서 더 자세히 얘기해 보자고, 우리 둘이 못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 나도 잠깐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는데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그런지 날이 너무 어두웠다. 집으로 다시 들어와 [유품정리사]를 계속 읽다가 목요일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벌써 한 달이 다 지나간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감방이나 군대 말고는 시간은 언제나 쏜살 같이 흐른다. 오늘은 정명섭의 소설책을 마저 다 읽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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