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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02. 2019

발사되지 않은 총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23

제주도에 와서 혼자 생활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 달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지낸 걸까. 오늘 아침에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브런치를 들여다보며 세어보니 여기 와서 한 달간 쓴 글이 43개였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기 전날 저녁 아내와 약속했던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라는 제목의 제주 일기와 틈만 나면 쓰는 '공처가의 캘리' 그리고 그냥 그때그때 떠올라서 쓴 산문 등을 합쳐보니 그렇다. 북이오의 프리즘이라는 게시판에 <글은 짧게, 여운은 길게>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칼럼  3편은 브런치엔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까지 치면 조금 더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쓴 건 일기인데 내가 쓴 글을 읽은 어떤 사람은 혼자 지내는 남자가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매일 그렇게 글을 올리는지 신기해한다. 아마도 내가 매일 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주제 없이도 글을 쓸 수 있고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쓰는 글이 오히려 좀 힘들다. 목적이 너무 분명해서 금방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에피소드가 다 주제의식을 향해서만 수렴되는 내용으로 구성된 영화나 소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물랑 루즈]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었던 바즈 루어만 감독의 [댄싱 히어로]를 볼 때 느꼈던 점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영화에서는 모든 게 다 춤으로 통한다. 주인공의 사랑도 춤으로 표현되고 꿈의 도전과 완성도 춤을 통해서다. 심지어 험상 궃은 남자들이 나타나 인상을 쓰며 주인공에게 결투를 신청했을 때도 결국 대결은 춤이었다.

안톤 체홉은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그 총이 발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체호프의 총' 이론이다. 그러나 그건 연극에서의 이야기지 정말 우리 인생이 어디 그런가?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에는 주인공이 약국에 가서 안약을 사면서 "아유. 쪼끄만 게, 일제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뭐 그냥 지나가는 장면처럼 처리된다. 그런데 만약 그 안약이 체호프의 총이 되려면 안약은 영화 후반부에 가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라도 이어져야 하는가. 그런 내용이 나오는 홍상수의 영화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오후에 리디북스에 들어가서 곽재식의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라는 책을 샀다. <박시은 특급>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이후 곽재식의 팬이 된 나는 그의 단편소설집을 사고 싶었으나 마감이 이번 주 일요일로 다가온' 짧은글 쓰기' 칼럼에 써먹을 구절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에 소설 대신 글쓰기 책을 구입한 것이다. 사자마자 잔뜩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으나 아쉽게도 이 책은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소설 작법들 위주로 쓰여졌고 또 글들이 너무 길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역시 불순한 의도로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만 깨닫고 책장을 덮었다.

누구나 영화 같은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대부분의 삶은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다. 간혹 총이 등장할 순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총에서 탄환이 발사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곽재식의 책만이 아니다. 내 삶엔 '발사되지 않은 총'들이 너무나 많다. 무릇 우리들의 삶이란 무의미로 점철되어 있으며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산문처럼 지리멸렬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드라마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혁명가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혁명가가 고민하거나 싸우는 장면은 나와도 똥 누는 장면이나 무단 횡단하는 장면은 안 나온다.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혁명가든 시골 무지렁이든 누구에게나 발사되지 않은 총은 무수하게 많다, 라는 다소 안일한 생각으로 약간 심란한 월요일 밤을 마감하려 하는 것이다. 비록 집에 남은 소주가 딱 두 잔밖에 없어서 아까 그걸 마시고 아쉬워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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