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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03. 2019

거울 선생이 태어난 날, 아내는 불을 뿜고

아내 없이 제주 한 달 살기 24

아침에 일어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좀 해서 아내에게 보냈다. 뭔가 심란한 일이었다. 아내 혼자서 서울에서 너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는 제주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무거우니 몸도 당연히 무거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사노 요코 여사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편지들로 이루어진 책 [친애하는 미스터 최]를 아무 데나 펼쳤는데 마침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왔다. 요코 여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통찰을 가지게 되었을까. 신기하고 멋지다.

통화했을 때 미스터 최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라고 하셨을 때 저는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습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할 만큼 행복하시니까요. 아주 행복한 사람은 바보이고 불행한 사람은 성격이 나빠요. 어느 쪽도 아닌 것을 신께 감사하세요.

사노 요코 여사는 [죽는 게 뭐라고]를 읽고 팬이 되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 할머니는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선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 곧바로 재규어 매장에 가서 잉글리시 그린 컬러의 스포츠카를 가리키며 "저거 줘요!"라고 외쳤다는 못 말리는 할머니였다. 나는 그녀가 '나는 취향이 저급하기로 유명하다'라고 하면서 소파에 드러누워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며 깔깔깔  웃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라고 얘기하던 부분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대뜸 배우 양희경 선생의 생일이라고 떴다. 나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언니 양희은보다 동생인 양희경이 더 좋았다. 양희경 선생은 대차고 똑부러지고 얄미운 이미지인 언니에 비해 뭔가 인간적으로 보였고 혹 자신이 인생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더라도 그걸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넉넉하게 위로해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생일이라는 안내문을 보자 순간적으로 양희경 선생의 마지막 '경'자에서 거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걸 가지고 작은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동네 사는 후배 박호산 생일 때 꿈 얘기를 지어서 선물했던 것처럼 말이다.

거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백설공주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데 백설공주, 왕비, 독사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동안 너무 우려먹어서 식상하다. 나는 말하는 거울에만 집중해서 연기자로 생활하는 양희경 선생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또는 뭔가 바람직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거울처럼 느껴지도록 이야기를 꾸며보았다. 제목은 '어떤 거울'로 정했다.


<어떤 거울>

유치원에서 백설공주 이야기를 처음 들은 소년은 집에 와서 거울 앞에 서서 물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자 거울이 대답을 했습니다.

"얘야, 그건 왕비가 할 질문이지. 너는 다른 걸 물어봐야 한단다. 그리고 다음부턴 존댓말로 해."

소년은 깜짝 놀랐죠. 거울이 진짜로 대답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럼 전 어떤 걸 물어야 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야지."

"그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구예요?"
"궁금해? 내가 보여줄게."

거울은 가난한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고 있는 목사님을 보여줬습니다. 깊은 정글에서 어린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있는 의사 선생님을 보여줬습니다. 한 나라의 수장이면서도 월급을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은 허름한 집에서 사는 대통령을 보여줬습니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에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도와 리어카를 끌어주는 대학생을 보여줬습니다.

"와,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소년은 그렇게 가끔 거울 앞에 와서 그때그때 궁금한 걸 물었고 거울은 소년이 물을 때마다 세상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마음을 보여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보여 주세요."

조금 자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소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
"오늘은 왜 대답을 안 해주시죠?"

한참만에 거울이 대답했습니다.

"바로 지금 보고 있잖니."
"네? 저요...?"

"그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너란다. 네가 어떻게 마음먹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나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란다. 그걸 잊지 마."

소년은 너무 기쁘고 신기해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웃다가 가까이 가서 거울 테두리 옆을 살펴보니 거기엔 조그맣게 '양희경'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소년에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지혜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태도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거울의 이름은 '양희경'이었습니다.

(양희경 선생의 끝 자가 옥 경(瓊)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 생일이라고 페이스북에 뜨길래 갑자기 거울 경(鏡) 자로 작은 동화를 하나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유치한 짓을 한 번 해봤습니다. 양희경 선생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생신 말고 생일. 이게 더 좋으시죠? )

너무 유치해서 혹 싫어하거나 어이없어 하진 않을까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쓴 이야기인데 그냥 버리긴 허무해서 눈 딱 감고 선생의 담벼락에 올려 버렸다. 제일 먼저 우리 부부가 겨울이면 늘 무대에서 한 번은 만나는 오미영 작가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다른 분들도 거울과 선생의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는 댓글을 달았고 양희경 선생도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본다며 좋아하셨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뭐든 너무 생각나면 바로 얘기를 하거나 글로 써버려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할 때도 많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아내가 기분 나쁜 일이 있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카톡으로 얘기를 하다가 도저히 답답해서 안 되겠는지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아내의 하소연을 들으며 그녀를 화나게 한 인물을 열렬히 규탄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점점 화가 났다. 실제로 그 인물이 잘못한 게 많았기 때문에 아내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골목길을 올라가며 입에서 불을 뿜던 아내는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야 전화를 끊었다. 서울로 올라갈 날이 다가오니 글도 안 써지고 안 그래도 심란한데 평온한 마음에 돌을 던지는 놈까지 나타나다니, 역시 세상은 늘 비협조적이야,라고 생각했다. 말 많은 밥솥 쿠쿠가 "쿠쿠가 지금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아" 라고 외치며 밥을 하고 있으니 얼른 따뜻한 밥을 퍼먹고 힘을 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이번엔 고양이 순자가 아내를 노려보며 화를 내는 사진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 사는 생물들은 다 화를 내는 날인가 보다 하고 하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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