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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10. 2019

좋아하는 일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인간들의 아름다움

[포드 V 페라리]

자동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제주도에 혼자 내려가 있느라고 본의 아니게 한 달 이상 가졌던 영화 공백기를 깨는 작품으로 [포드 V 페라리]라는 자동차 경주 영화를 택한 이유는 순전히 인스타그램에서 영화 리뷰를 올려주는 'moviesta.hj'라는 분의 평 때문이었다. 정말 영화를 많이 보는 분이고 보는 영화마다 정성 어린 리뷰를 남기는 분인데 언제나 그 글이 솔직 담백하고 공감이 가서 무조건 신뢰하는 편이다. 그런 분이 극찬을 한 영화를 어떻게 안 보고 넘어간단 말인가. 벌써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할리우드]나 [아이리쉬 맨] 같은 특급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기회를 날려버린 나는 이 작품만큼은 반드시 극장에서 보리라 결심하고 어제 CGV 왕십리 4DX관을 예약했다.

홍상수의 [밤과 낮]에서 김영호의 직업이 화가였던 게 그토록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큰 골격과 이전에 보여준 거친 이미지 때문이었다. 왠지 우악스럽고 무식할 것만 같은 남자가 구름을 주로 그리는 화가라니. 이런 선입관은 국가나 자동차 회사의 정체성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뭐든 크고 실용적인 것만 좋아하는 미국이, 값싸고 대량 생산하는 차만 만드는 포드가 예술적·장인적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페라리의 우수성을 넘보다니. 1960년대 중반 경영난에 빠진 페라리를 인수하러 갔다가 이런 창피를 당한 헨리 포드의 손자이자 회장인 헨리 포드 2세는 페라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포드가 자체 개발한 스포츠카로 24시간 레이싱 경기인 르망에 출전해 우승을 해서 페라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왕년에 르망 출전 경험이 있는 전설적인 레이서이지만 지금은 건강 문제로 스포츠카 디자인과 판매에만 매진하고 있는 캐롤 셸비와 레이싱 실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사회적이지 못해 정비소 운영에도 곤란을 겪는 켄 마일스가 투입된다.

처음엔 제목이 뭐 이따윈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포드 대 페라리'라니. 그런데 자세히 보니 V는 대결을 뜻하는 'versus' 즉 vs. 가 아니라 그냥 V였다. 아마도 포드가 페라리를 이긴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영화 정보들을 찾아보니 감독이 제임스 맨골드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미국 영웅주의나 포드 만세와는 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뻔하고 재미없는 제목의 지루함을 이겨내고 이 영화를 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배우 맷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런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절대로 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예상대로 그들의 연기는 눈이 부셨고 그 연기의 바탕이 되는 시나리오 역시 훌륭했다. 특히 맷 데이먼이 포드의 행사장에서 하는 연설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자기가 좋아하고 또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저 캐롤 셸비이고 또 하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맷 데이먼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포드 회장 대신 크리스천 베일을 쳐다본다. 내가 지금 말로는 헨리 포드라고 하지만 사실 이건 나와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라고. 물론 켄 마일스도 그걸 금방 알아듣는다.

한겨레에 영화평론가 한동원이 쓴 것처럼 이 영화는 '포드 대 페라리'라기보다는 '포드 대 포드'라는 게 맞는 말이다.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다. 캐럴은 사사건건 프로젝트에 개입하는 부사장과 마케팅 팀장(그 유명한 아이아코카다)에 맞서 켄이 경기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승부사적 기질과 역량을 총동원한다. 영화 도중 곤경에 빠졌을 때 켄이 "뭐, 플랜이라도 있어?"라고 묻자 "있지. 엄청나게 위험한 플랜( Extremely dangerous plan)이.” 라고 대답하고는 포드 회장을 스포츠카에 태워 폭주하는 씬은 정말 영화적이면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명장면이다. 캐롤은 이 퍼포먼스에 자신의 모든 경력과 운영하는 회사의 지분까지 걸었던 것이다. 15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재미있는 장면들이 캐릭터와 잘 녹아 곳곳에서 잭팟을 떠트려 주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이 크리스찬 베일 집 앞으로 찾아가 사과를 할 때도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오던 크리스찬 베일이 냅다 맷 데이먼의 얼굴에 선빵을 날린 뒤 강아지들처럼 싸우는 장면은 [넘버 쓰리]에서 최민식과 한석규가 포장마차에서 만나 "한판 뜹시다" 라고 외친 후 어린이놀이터에서 엉키던 장면과 흡사해서 내내 미소를 지었던 부분이다. 제작비 1억 달러에 가까운 엄청난 프로젝트였지만 맷 데이먼은 매일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촬영장 가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고 한다(나는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표정에서 [암수살인]의 주지훈이 느껴졌다. 혹시 주지훈이 크리스천 베일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난 그가 스스로의 스타성을 너무 의식하는 게 이따금 느껴져서 그리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영화가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켄 마일스나 캐롤 셸비 둘 다 인생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거나 도사 같은 표정을 짓는 일 없이 영화 내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천진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동차 안에서 혼자 하하하 웃고 소리를 지르다가  7,000 RPM을 기다려 기어를 바꾸는 켄이나 밖에서 혼잣말로 "기다려, 기다려... 지금이야!"라고 외치는 캐롤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나도 객석에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내가 간 극장은 자동차 엔진의 떨림이나 속도감을 영화 안과 똑같이 느낄 수 있는 4DX였으니까.

흔히 비주얼이나 퍼포먼스가 뛰어난 영화는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남는 게 많다. 지금보다는 백 배는 단순했던 1960년대라는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현재처럼 느낄 수 있고, 뛰어난 각본과 연출이 배우들을 얼마나 신나게  해 줄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게 얼마나 멋지고 신명 나는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이 영화의 스포일러는 레이싱이 주제가 아닌 소재로 쓰였다는 것뿐이다. 좋아하는 일을 도모할 때 인간이 얼마나 무모하고 순수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꼭 극장에서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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