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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15. 2019

이 인터뷰가 대단하다!

페이퍼의 김민정 인터뷰

포토그래퍼에게 사진 찍는 법을  잘 배우기만 하면 나도 사진작가들처럼 인물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열망과 체념이 함께 어우러진 노인의 깊은 주름살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 스민 막연한 두려움 같은, 인간의 삶이 느껴지는 사진은 촬영 기술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그 대상과 진정 마음으로 친해진 후라야 겨우 그런 사진  한 장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문학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번 <페이퍼> 가을호에 실린 시인이자 편집자인 김민정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각설하고>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은 그동안 김민정이 낸 시집과 산문집의 제목들이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선생의 에세이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박준 시집의 제목은 또 어떤가. 정유희 편집장은 얄미울 정도로 책 제목을 잘 짓는 편집자 김민정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일단 책 제목을 너무나 잘 짓는 김민정을 한때 질투했다는 정유희의 이야기가 나오고(그러는 자신도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감각적인 책 제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가 그동안 어떻게 책을 만들고 시를 써왔는지에 대한 흥미진진한 사연들이 오밀조밀 펼쳐진다. 완전 신인이었던 박준 시인을 발굴한 것도, 일반 독서 대중에게 노출되어 있지 않았던 황현산 선생을 끌어낸 것도, 허수경 시인의 마지막 책을 낸 것도 결국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쓰는 일에 대한 고통과 즐거움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 예를 들면 자신이 먹는 약 이름 중 '졸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걸 시에 막 쓰고 싶고 그런다'는 그의 고백(아, 쓰고 싶은 욕망이 김민정을 살리는구나. 특히 재미난 상황이나 이름들을 못 참는 것 같아요. 삶의 의지가 남아있다는 증거겠죠)은 어떻게 그가 늘 화제의 작품들을 기획해 내고 왜 그의 곁엔 항상 쟁쟁한 문인과 문화계 인사들이 들끓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말 그는 일을 떠나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일례로 독일에 있던 허수경 시인과 주고받은 이메일만 원고지로 1,000매가 넘는다고 한다.

허수경 시인이 사망한 뒤 독일에 가서 시인의 남편에게 마지막 원고 뭉치를 받아 들고 와서는 너무 슬퍼 한 동안 읽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었던 일과 뒤늦게 빠져 있던 노트의 존재를 깨닫고 독일인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한 장 한 장 스캔으로 받은 일화를 읽을 땐 가슴 한 구석이 찡했고 황현산 선생의 책을 낼 때 하도 답답해서 토요일 대낮에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울다 잠이 들었다가 '어머, 내가 자다니!' 하고 벌떡 일어나 교정지에서 제목으로 쓸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는 얘기를 읽을 때는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뻔했다.

이 인터뷰는 당산동에 있는 '비덕살롱' 옆 카페 <곁愛>에서 8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시인이고 편집자이면서 <난다>라는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한 김민정이라는 사람이 그동안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왔고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 했으며 어떤 책들을 만들어 왔는지 앉은자리에서 삼십 분 만에 파악할 수 있는 '문화적 엑스레이' 같은 글이다. 솔직 담백하고 유쾌한 인터뷰이 김민정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든 책을 줄줄 꿰는 것은 물론 책을 하나 만들 때마다 손톤 색깔을 바꾸는 김민정의 작은 습관까지 꿰뚫어 보는 정유희라는 노련한 인터뷰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민정 시인은 지금도 연말이면 제주도 호텔로 원고 수십 개 싸들고 내려가 책 만들고 새로운 것도 기획한다고 하니 그의 부지런함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인터뷰에 나오는 고 노회찬 의원, 소설가 박민규, 소설가 정채봉 선생과의 인연도 하나하나가 모두 신기하다. 특히 정채봉 선생이 "민정 씨, 시 쓰세요."라는 말을 듣고 대학 때 썼던 시들을 프린트 해 한 편씩 딱지처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인천에서 신사동까지 출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퇴고해 첫 시집을 낸 이야기나 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인쇄소에 눌러앉아 제본까지 집요하게 챙긴 에피소드들은 책 만드는 사람을 떠나서 일 하는 사람의 프로의식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일본의 타카라지마사가 1988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발행하는 미스터리 소설 가이드북의 제목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이다. 나는 페이퍼의 이번 김민정 인터뷰를 읽고는 대뜸 '이 인터뷰가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시즌 페이퍼는 '환경 특집'으로 칼럼과 소설 등 여러 가지 읽을거리가 그득하다. 그러나 책을 열면 맨 먼저 나오는 이 인터뷰 기사만으로도 이번 호는 소장각이다. 어서 시내 대형서점으로 달려가 이번 페이퍼를 구입하시기 바란다(아, 참고로 며칠 전 갔던 왕십리 영풍문고에서는 안 팔더군요). 그렇다. 이건 그냥 마음이 우러나서 한밤중에 일어나 돈 안 받고 쓰는 페이퍼의 광고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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