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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03. 2020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영화

 파비안느의 진실

1980년대 라디오로 듣던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에서 김세원이 "프랑스에  가보니 아직도 카트린느 드뇌브는 최고더군요."라고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지성적인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 나의 아내는 "셸브르의 우산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 그런 카트린느 드뇌브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만났다. 놀라운 일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원제는 '진실'이다)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 배우 파비안느가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뉴욕에 살던 시나리오 작가 딸이 엄마를 찾아오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러 가기 직전 전철 안에서 CGV 실관람평을 읽어보니 살짝 지루하다는 리뷰가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웬걸, 영화는 너무 좋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엔 딸인 뤼미르가 파렴치한 엄마의 거짓을 파헤치는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속을 빤히 드러내는 내용이 아니다. 파비안느는 모든 삶을 '연기하듯' 살아가고 자신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진실이 있고 진심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연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테마를 통해 예술과 삶이 어떻게 서로 스며들고 예술가의 삶이 주변인들에게 어떤 보상과 상처를 남기는지 살펴본다. 오랜만에 촬영장을 찾아 간 딸 뤼미르는 "스튜디오가 이렇게 작았나? 어렸을 땐 무척 커보였는데. 역시 기억은 믿을 게 못돼." 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모든 영광과 상처, 즐거움은 저마다의 기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파비안느는 훌륭한 배우였지만 좋은 엄마도 아니었고 좋은 아내도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보다 연기를 잘 하는 동료 여배우 사라의 역을 훔치기 위해 영화 감독과 잤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파비안느를 연기하는 카트린느 드뇌브는 예전처럼 아름답고 품위 있기보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불안하고 난처한 표정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배우는 예술과 작품으로 이겨야지 영화 밖으로 나와 정치나 사회운동을 하는 건 떳떳치 못하다"라는 특유의 예술론을 펼칠 땐 당당하다. 그리고 설사 자신이 감독과 자서 그 역을 따냈더라도 제대로 그 연기를 하지 못했다면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평생 스타로 살아온 파비안느 역에 그녀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딸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도 너무 뛰어나다. 그녀는 거짓된 삶을 사는 엄마를 비난하지만 그녀의 삶에도 남들이 모르는 아쉬움이 있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시나리오 작가로 풀린 것도 그렇고 남편 행크가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는 것을 숨겨야 하는 처지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국 '내가 실생활에서 해야 할 말도 연기처럼 하면 되지 않느냐'면서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조르는 엄마를 위해 대사를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리고 에단 호크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그저 그런 B급 TV 배우인 것도 너무 마음에 든다. 나이 들어가면서 어깨에 힘을 뺀 남자의 모습을 보는 건 흐뭇한 일이다.

이번 영화 역시 시나리오가 참 좋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과 영화라는 보편타당한 소재로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펼치면서도 프랑스 사람들에게 딱 맞는 대사 - 성공한 여배우들은 모두 이니셜이 겹치는 거 알아요?  아누크 아메, 클라우디아 가르디날레...브리짓 바르도..아, 걔는 쫌. - 까지 웃음기를 섞어가며 능수능란하게 엮어낸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SF영화의 상징성도 좋다. 병에 걸려서 나이가 들지 않는 외계 행성에 가서 살아야 하는 엄마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월이 흘러 70살이 된 딸이 젊은 엄마에게 이제 자기 곁에 있어 달라고 조르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촬영 현장을 통해 파비안느가 가진 개인의 성격과 예술에 대한 집념은 물론 다른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까지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딸 뤼미르에겐 엄마이자 배우인 파비안느를 처음으로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특기가 가족영화라면서 이번에도 훌륭한 가족 이야기를 들고 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건 가족 영화라기보다는 예술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자서전이 거짓말투성이라고 항의하는 딸에게 "모두 진실일 필요는 없어. 영화란 그런 거야." 라는 말로 시작해서 기억에 대해, 예술에 대해, 나이가 공존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십수 년 전 줄리엣 비노쉬와 함께 작품을 하나 하기로 약속했고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공책에 카트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가족]으로 칸 그랑프리를 탄 직후에 에단 호크에게 이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했단다. 에단 호크가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는 배우와 이야기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고치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번에도 카트린느 드뇌브에게서 받은 인상을 기초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러니 이렇게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작품이 나온 거다. 특히 집에 돌아다니는 거북이에게 전 남편의 이름을 붙여놓고 자신이 '뱅센숲의 마녀'처럼 사람을 동물로 변신시킬 수 있다고 손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카트린느 드뇌브의 모습은 정말 귀엽다. 따뜻하고 훈훈한 겨울을 만들어주는 영화이니 끝나기 전에 얼른 극장에 가서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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