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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09. 2020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을지로의 밤

영문과 친구들 만난 날

일 년에 딱 한 번 만나는 애들이 있다.  대학교 과 동기들의 모임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영문과를 나왔다. 애초에 국문과에 가고 싶었으나 서울대 국문과 출신임을 일생일대의 자랑으로 삼던 고3 때 담임 니콜라스 선생(당시 MBC에서 일요일 오전에 틀어주던 외화 <아들과 딸들>의 막내아들 니콜라스와 헤어스타일이 똑같아서 붙은 별명이었다)께서 "국문과 가면 너 밥 굶는다"라고 잘라 말하며 극렬 반대를 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선택한 영문과였다. 사실 그때는 영어를 좋아하기도 했고 또 영어 성적도 상대적으로 좋았던 편이라 들어가긴 했지만 막상 입학을 해보니 커리큘럼 전체가 너무 영어로만 채워져 있는 것에 질려서 나는 곧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불량학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영문과에 다니면서 영어를 싫어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영문과 학우들이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대낮부터 술집이나 당구장으로 몰려다니다가 형편없는 성적으로 학부를 마쳤고 졸업 후에는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처럼 다들 뿔뿔이 흩어졌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의(인규였나, 해근이었나?) 주선에 의해 기적적으로 몇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재작년에 처음으로 이 모임을 알게 되었는데 작년엔 연일 계속되는 술자리에 지쳐 참석을 못했다가 올해 다시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모임은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씩 열리는데 날짜는 달라져도 장소는 언제나 을지로에 있은 '남경'이라는 중국집이었다. 나는 저녁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남경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도 주문하지 않은 채 황정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읽었다. 일곱 시가 다 되어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는 성북동 계세언 셰프가 하는 '아삐에디'에 들러 스파게티를 한 그릇 먹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며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되 날이 너무 추우니 술은 많이 마시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아내를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일곱 시 정각이 되어 남경의 예약 홀로 들어서니 이미 거의 모든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기본안주만 깔린 테이블 위의 술잔을 집어 높이 들었다. 맥주와 소주로 소맥을 제조하는 친구도 있었고 연태고량주를 마시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첫 잔을 소주로 비우고 그다음부터는 연태고량주로 갈아탔다. 대개는 재작년에 생사를 확인한 사이였지만 철호처럼 30년 만에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었다. 근데 온통 남자애들 일색이었다.
"아니, 우리가 남자 학교에 다녔던가?"
내가 다소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따졌더니 그래도 여자애들은 해근이가 좀 연락을 하는 편이라고 하며 다들 해근이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었고 해근이는 요즘 연락되는 여학우가 거의 없다는 대답을 해서 다른 친구들의 원성을 샀다. 명자에게라도 연락을 해보지 그랬냐고 누군가 말했더니 명자가 누군데? 라고 묻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당시 영문과의 최고 미녀였던 명자를 기억조차 못하다니. 명자가 이름을 유선이로 바꾼 건 기억나냐고 물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근이는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단 말인가. 명자를 필두로 졸업 후 명자처럼 국내외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근무했던 지정이, 은영이 얘기가 나왔다. 명은이와 춘희, 철주 얘기도 나왔다. 용선이가 춘희는 요즘도 연락이 되는데 골프를 남자애들보다 잘 친다고 했고 원규가 은경이는 요즘 오산시에서 시의원을 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당장 페이스북을 열어 원규가 알려주는 은경의 사진을 누르고 친구 신청을 했다. 나는 모델 에이전시를 했던 윤월이와는 자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젠 연락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오늘 오지 못한 한득이, 상범이, 진오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상범이와는 그래도 미운 정이 쌓여서 가끔 가시 돋친 메시지라도 주고받곤 했는데 요즘은 그것조차 끊이진 상태라고 말했다.

호석이가 자신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영문과에 들어간 것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가는 데마다 "영문과를 나왔으면..."하고 영어에 관련된 일을 시키지 못해 안달하는 것에 질렸는데 특히 군대에 있을 때 영문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88올림픽 운영본부에 끌려가 3개월 간 통역 업무에 투입되었던 것이 가장 크게 치른 곤욕의 역사라고 말했다. "야, 그래도 통역을 하려면 영어로 열 마디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냐?" 라고 누군가 물었더니 호석은 외국인이 오면 "헬로~" 어쩌구 얼렁뚱땅 몇 마디 던진 후 얼른 본부에 있던 항공사 직원들에게 인계를 하고 자신은 계속 도망을 다녔다고 했다. 영어에 치여 구석으로 도망 다니던 호석의 얘기를 들으며 다들 깔깔 웃었다. 나도 영문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팀스피릿 훈련에 통역병으로 끌려가서 곤욕을 치를 뻔했는데 다행히 같은 부대에 한국말을 지나치게 잘하는 미군이 하나 있어서 통역은 전혀 안 하고(못하고) 식기를 닦고 보초만 서다 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용선이나 철호만 군대 얘기를 안 했는데 얘네들은 둘 다 눈이 너무 나빠서 면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러운 놈들이다.

해근이는 입사 면접 때 교포 출신 사장이 "영문과를 나오셨다니 제가 영어로 질문을 해볼게요."라고 한 뒤 정말 영어로 질문을 하는 바람에 황당했던 이야기를 했다. 해근이는 당시 꽤 좋은 광고대행사였던 나라기획에서 매체 업무를 오래 했는데 그때 사장이 미국에서 온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다들 영어 때문에 고생한 친구들의 무용담들이 넘쳐흘렀다. 아마 내가 제일 공부를 못 했을거야, 라고 누군가 말하자 다들 자기가 더 성적이 안 좋았을 거라고 앞다투어 셀프디스 퍼레이드를 벌였다. 모두들 성적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대학의 광고창작과 교수로, 시청의 공무원으로 또는 유능한 사업가로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으니 신기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골프 친지 얼마 안 된 훈화가 골프 얘기를 시작했다. 수많은 골프 얘기 중에도 동남아 골프 코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호석과 영훈이가 전문가처럼 잘 알고 있었다. 골프를 싫어하는 나는 역시 골프를 싫어하는 철호를 찾아내 골프를 싫어해도 좋은 이유들을 개발하면서 골프라는 운동과 그 운동을 대하는 사람들의 거만하고 기득권적인 태도에 대한 규탄을 퍼부었다. 광고창작과 교수인 철호는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서 매우 분위기 있는 지식인처럼 보였는데 정작 나를 보고는 '너는 왜 아직도 머리카락이 검으냐?'고 물어서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저마다 아이들 대학 보낸 얘기, 졸업한 얘기, 군대 보낸 얘기, 유학 보낸 얘기 등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소한 고등학교 다니는 애들이 하나 둘씩은 있는 각 집안의 공통점은 학비나 유학비 때문에 아버지들의 허리가 휜다는 것이었다. 모인 친구들 중 애 없이 지내는 경우는 독신인 영산이와 늦게 결혼한 나밖에 없는 듯했다. 내가 작년 5월 말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다고 했더니 다들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친김에 지난해 11월엔 혼자 제주도에 한 달간 내려가 있었다고 말하자 "아니, 아내가 그렇게 하는 걸 용인해?"라며 놀라는 것이었다. "그럼! 제주도의 별장은 아내가 주선해 준건데." 라고 말했더니 더욱 놀라며 도대체 한 달간 뭘 하며 지냈냐고 물었다.
"책 읽고, 글 쓰고."
짧고 얄미운 나의 대답에 친구들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꿈같은 얘기 아닌가. 나는 '어떻게 될진 잘 모르겠지만 글 쓰는 걸 좋아하니 일단은 계속 글을 써볼 생각'이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고, 용선은 자기 여동생이 참 마음대로 사는 편인데 너는 내 동생보다 더 맘대로 사는 것 같아 부럽다, 고 말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해근이도 자기 아내에게 '내가 비록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내 친구 중엔 이런 놈도 있다'면서 가끔 내가 쓴 페이스북 페이지의 글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격려해 주었다. 돈도 한 푼 없고 심지어 직장도 없는 놈이 졸지에 성공한 놈들 틈에 끼어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이 연출되었다. 물론 친구들이 곧 동남아 골프 여행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을지로의 밤에 참석해 예상치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차는 을지로골뱅이로 가서 맥주를 마셨는데 다들 몸을 사리는 바람에 술자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나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술이 좀 모자라는 것 같아서 아내를 꼬셔 라면 안주에 소주를 조금 더 마시고 잤다. 물론 라면은 내가 끓였다. 설거지도 내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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