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민호의 [남산의 부장들]은 그 어려운 걸 해낸다. 감독은 김규평, 박용각처럼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함몰되지 않으려 했지만 정작 10.26 시해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의 상황이나 대사들은 디테일까지 철저하게 고증을 따라 드라마의 내러티브가 가벼워지는 것을 막았다. 실제 있었던 대사들을 활용한 시나리오가 매우 좋은데 특히 "맘대로 해.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라는 박정희의 대사가 세 번 반복되는 장면은 상황마다 부하들을 장기판의 말 바꾸듯 갈아치우는 독재자의 잔인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이번 작품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어떤 새로운 논리나 정당성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으나 역시 그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10.26은 미리 계획했다고 보기엔 너무 충동적이었고 정의롭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사로움이 얽힌 면이 많았다. 그래서 영화는 '유신의 심장을 저격하는 야수의 심정으로' 같은 김재규의 레토릭에 현혹되지 않고 시해 사건 40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되짚어 봄으로써 '대통령 시해'라는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려 노력한다.
연기자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이병헌은 표정, 눈빛, 머리를 쓸어 올리는 제스처까지 최고의 내공을 선보인 끝에 김재규를 일약 고뇌하는 햄릿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다. 차지철 역을 위해 20Kg이나 살을 찌웠다는 이희준도 좋고 유들유들하게 김형욱 역을 잘 해낸 곽도원의 파워도 훌륭하다. 그리고 박 대통령 역을 맡은 이성민은 눈썹, 입매, 헤어스타일, 목소리까지 똑같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박정희스러운 캐릭터를 구현했다. 정말 대단한 배우다. .로비스트 역을 맡은 김소진은 점점 연기가 좋아지더니 이 영화에서는 아예 펄펄 난다.
그리고 전두환 역의 서현우. 연기도 잘 못하고 카리스마도 전혀 없다. 그런데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지인들은 이 찌질한 캐스팅이야말로 가장 절묘했었다고 입을 모았다. 예전에 MBC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을 맡은 이덕화가 너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는 바람에 전두환은 혼자 안 먹고 주변을 챙기는 의리남으로 알려지고 급기야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황당한 모임까지 생겨난 걸 생각하면 이번 캐스팅은 그런 어리석은 인식을 바로잡고 전두환이라는 죄인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감독의 의중이 잘 담겨 있는 캐스팅이다. 영화에서 전 장군은 아무런 품위도 없고 중요한 인물도 아니며 그저 찌질하다. 마지막에 금고에서 몰래 금덩어리를 꺼내 더플백에 쓸어 담고 뒤를 힐끔거리며 나오는 졸장부가 전두환의 본모습인 것이다.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이 역사를 가지고 이죽거렸다면 우민호의 [남산의 부장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사건과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특히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해 개인과 역사가 어떻게 특정 사건으로 엮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였는데 다행히 [마약왕]보다는 [내부자들]에 더 가까운 것 같아 매우 뿌듯했다. 극장에서 보시라. 최고의 연기는 이병헌, 최고의 캐스팅은 전두환. 영화를 보고 나온 나의 한 줄 평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