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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01. 2020

회사를 안 다녀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

아담 팬들턴의 전시회 [These Elements of Me]에서 느낀

회사를 그만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더 이상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일상의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즉, 자유시간을 누리는 만큼 월급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월급과 바꾼 자유시간이라고 해서 늘 알차고 보람되게만 쓰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며 지낸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회사를 안 다니기에 할 수 있는 일들도 가끔은 있다. 낮에 열리는 각종 문화행사에 가거나 이른 저녁에 열리는 세미나·컨퍼런스 등에 참석하는 것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직업의 특성상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라 저녁에 열리는 행사에는 아예 참석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펑펑 남아 도니까 안테나만 잘 세우고 다니면 좋은 행사에 무료로도 참석할 수가 있다.

 아담 팬들턴의 전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옆집 총각이었던 동현이 알려줘서 누리게 된 행운이었다. 전시 폐막 바로 전날인 2020년 1월 31일 낮에 이태원에 있는 페이스갤러리를 찾았다. 전시 제목은 《These Elements of Me》였다. 팬들턴은 지난 2012년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계 정상의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와 전속 계약을 체결해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1970년대 이후 전속계약을 맺은 작가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포브스 30세 이하 30인(Forbes 30 Under 30)'에 두 차례 선정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고도 한다. 나는 갤러리로 가는 전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런 기사들을 찾아 읽다가 아내에게 "포브스는 경제지 아냐? 거기서 예술가도 선정을 하나 보지?"라고 물었더니 아내는 '포브스는 경제인뿐 아니라 그 해의 영향력 있는 젊은 리더들을 해마다 뽑는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갤러리에 들어서니 강렬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네 개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흑인 작가인 아담 팬들턴은 모든 작품을 흑백의 드로잉으로 처리하는데 캔버스와 붓 대신 필름 위에 실크스크린 잉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거칠고 대담한 터치를 선보인다. 어떤 작품은 글씨와 그림이 결합되어 있고 어떤 작품은 추상적인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나는 그림 앞에 서서 작가가 작업하기 전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팬들턴은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구축한 작가다. 그에게 글씨나 선의 구체적 의미는 이미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글이나 페인팅이나 출발은 모두 비슷하다. 어떤 영감이나 통찰이 떠오르면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자신의 터치로 그 생각들을 사각의 틀 안에 잡아넣을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면 새로운 작품이 생겨나는 것이다.

갤러리에서 나눠준 안내문을 읽어보니 팬들턴은 작업의 바탕에 거울이나 투명한 슬라이드, 반사되는 표면을 즐겨 사용한다고 한다. 흑인 아티스트라는 아이덴티티에 걸맞는 흑백의 굵고 힘찬 시그니처가 있으니 과감하고 실험적인 오브제들을 사용하더라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요소들이 절묘하게 섞인 그의 개성적인 성취가 부러웠다. 아내가 화랑 직원에게 "작품들이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섹터별로 모여 있는 것 같은데, 작가가 다 정한 것이냐?'라고 물었더니 작품의 간격과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작가가 정해준 대로 전시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은 총 46점이었다. 하나씩은 팔지 않고 전체를 한 묶음으로 판매한다고 하는데 한 세트 가격은 69만 불, 우리 돈으로 약 8억 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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