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너무 좋다고 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전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며 어깃장을 놓는다. 연하인 이 남자와 어찌 좀 잘해보려던 여자는 "하이고, 놀란요?!"(경상도 사투리 쓰는 여자다)라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홍상수 감독이 만들던 영화에서 PD로 일했다던 김초희 감독의 작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봤다. 월요일 오후 2시 상영이긴 했지만 코로니 19가 얼마나 사람들의 발걸음을 끊어놨던지 대학로에 있는 극장 안엔 나와 아내까지 단 세 명이 관객의 전부였다.
찬실이 역을 맡은 강말금 배우가 거의 원맨쇼 같은 연기를 펼치고 주인집 할머니로 나오는 윤여정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보다 훨씬 좋은 연기를 펼친다. 함께 일하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쓰러져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영화 일이 끊겨버린 찬실이가 호구지책으로 친한 후배 영화배우 소피의 집에 가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찌질하고 짠하면서도 능청스럽다. 엉뚱하게 장국영 귀신을 등장시키기도 하는데 너무 억지스러운 것 아닌가 하다가도 나중엔 공감 가는 면이 있어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깊이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가 등장인물 사이를 빙빙 도는 플롯은 그 질문의 의미나 가치가 너무 모호해서 두 시간 가까운 장편으로 만들기에는 주제로서의 공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래도 기이하게 극찬을 받았던 [메기]처럼 잘난 척을 하진 않아서 좋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초반에 소개한 에피소드처럼 놀란보다는 야스지로에 가까운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도 나름대로의 사랑과 슬픔과 기대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시한폭탄 중 하나가 펑하고 터진다. 물론 무엇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서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영화에서도 끝까지 뭔가 펑하고 터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꿈을 꾸는 걸 멈추면 안 된다는 마음에 지은 제목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김초희 감독을 응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초희 화이팅, 찬실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