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r 11. 2020

디지털이 만들어낸 아날로그적 감동

1917


영화 [1917]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영국군 병사 두 명이 독일군들이 구축해 놓은 진지를 가로질러(독일군은 퇴각했다) 아군 중대 맥켄지 대령에게 가서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하면 끝나는 것이고 그것만이 독일군에게 속아 새벽 공격을 감행하려는 대령과 1,600명의 병사를 살리는 길이다. 이런 간단한 플롯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친할아버지의 참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한 샘 멘데스 감독은 영리한 각본과 촬영 기법으로 이 난제를 돌파하려 했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가 채택한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은 정말 병사 두 사람을 시종일관 계속 앞이나 옆, 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맨 처음 참호를 달릴 때 기나 긴 참호 속에서 스치듯 보이는 각양각색의 병사들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룬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카메라가 어디서 장면 전환이 되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론 몇 군데 찾아내긴 했지만 그게 무슨 영화 상의 대단한 결함이나 발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카메라 기법 덕분에 작품에 대한 몰입도는 엄청나다. 나는 CGV용산에서 아이맥스로 봤기 때문에 그 쾌감이 더 깊었던 것 같다.


하필 나무 밑에 누워 쉬고 있던 자신을 장군에게 파트너로 함께 데려가는 바람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스코필드가 투덜대자 블레이크는 자신도 몰랐다며, 그저 보급품 수령이나 하라는 건지 알고 불려 갔던 것이라며 사과한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에 1,600명의 목숨이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나 같은 게 뭐라고 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나 몰라라 한단 말인가. 인간을 영웅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은 이런 선한 의지와 책임감, 보람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가깝게는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부터 멀리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까지 이런 촬영 기법은 늘 놀라움과 흥분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카메라의 테크닉과 스토리의 지향점이 일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 '원 컨티뉴어스 숏'으로 찍은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올라오는 엔딩 크레디트에는 디지털 부문의 스테프 이름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우리가 두 시간 십 분 동안 보았던 그 생생한 참호와 진지와 흑탕물과 시체들은 모두 이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노력에 의해 사실성을 획득한 것이다. '1917'은 한 마디로 디지털이 만들어낸 아날로그적 감동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놀런보다는 야스지로에 가까운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