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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25. 2020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김혜진의 경장편 소설인  책은 지난주 갔던 <서촌  서점> 하영남 사장님이 추천해서 읽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사별하고 혼자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며 근근이 살아가는 엄마에게 대학강사 딸이 사정이 생겨 집으로 잠깐 살러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배울 만큼 배우고 똑똑한 삼십 대 중반의 딸은 결혼해서 정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쫓아다니더니 급기야 레즈비언 애인을 데리고 들어와 동거를 하겠다고 엄마에게 '통보'  것이다. 딸의 애인은 딸의 이름 대신 그린이라는 닉네임을 부른다. 딸도  애를  레인이라 칭한다. 그런 딸과 딸의 애인이 엄마는 마음에  든다.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 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김혜진이 구사하는, 따옴표를 따로 쓰지 않고 대화와 서술을 뒤섞은 현재 진행형의 문장들은 침착하고 차분하고 냉정해서 역설적으로 격하고 뜨겁게 읽힌다. 딸을 이해하고 싶지만 도통 그게 되지 않는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자기가 보살피던 노인 젠에게 집착한다. 예전에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보살펴  혈육 하나 없는 환자 젠에게 자신을 대입해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엄마.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학에서 쫓겨나게  . 그린과 만난   년이나 되어 이제는 그녀의 생활비를 대고 있으면서도 애인의 모친에게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레인. 김혜진은 주인공의 딸이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어떤 영화를 보여줬는지,  얼굴과 목에 붉은 상처가 나게  건지, 엄마는 레인에게 어떤 싫은 소리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그걸  상상할  있게 해준다. 글을  쓰는 작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소설을 거의  읽어갈 즈음, 딸도 없고 누구의 엄마도 아닌 내가 굳이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딸을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그걸 포기하지 않는 엄마 얘기가 나와서다. 혈육도 아닌 젠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고 장례까지 치러주는 요양보호사 이야기가 나와서다. 자신이 레즈비언인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그것 때문에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린치를 당하는 현실에서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딸이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주는 보통 남자분이 하시는데요. 남자분은  계세요?"라고 묻는 장례식관리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딸에 대하여' 읽는 것은 유려한 문장과 집중적 서사로 이루어진  작품이 '인간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것이다.

딸과 엄마가 우동을 먹는  장면부터 젠의 장례를 마치고 엄마가 잠이 드는 장면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주인공이 잠들면서 끝나는 소설은 최인호의 [ 마음의 풍차] 이후  오랜만인  같았다.

그런  받아들일  있을까. 견뎌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내일들을 지날  있을 거라고 믿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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