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성 치매를 이기고 모인 한옥 공사 견학단

도시형 한옥 집수리 16일째

by 편성준

"이번 토요일에 우리가 뭘 하기로 한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몰라. 기억이 안 나."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토요일에 서촌에서 술 마실 때 일주일 후 다시 모이기로 한 것 같긴 한데 그때 너무 취해서 왜 만나기로 했는지는 도통 기억을 못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해서 "근데 우리가 왜 만나죠?"라고 물어보자니 너무 챙피해서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는데 온수진 씨가 카톡에 '3.28 성북동 마실'이라는 제목의 대화방을 개설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집 한옥 공사 현장을 방문한 뒤 성북동에서 한 잔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지난번 모임에서 걷었던 돈이 조금 남아 있으니 저녁 5시에 성북동으로 와서 집수리하는 걸 잠깐 둘러보고 구포국수에 가서 한 잔 하기로 했다. 온수진 씨가 '한옥 수리하는 걸 보고 싶다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데려가도 되냐'라고 묻길래 당연히 된다고 했다. 조유겸 씨가 "건강 상담이 가능한 친구예요."라고 하길래 그럼 알콜성 치매에 대해 상담도 가능하냐 물었더니 "그건... 쫌. 그도 만만치 않을 듯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현장으로 내려가 보니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라디오는 어디서 났느냐고 아내가 물었더니 싱크대 철거할 때 가스레인지 환풍기에 붙어 있던 라디오를 뗀 것이라고 한다. 보통 철거할 때 거기 라디오가 있다고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다들 그냥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라디오는 생각보다 성능이 좋았다. 싱크대에 붙어있던 라디오라니. 괜히 즐거웠다.


못 보던 벽이 생겼다. 월요일부터는 미장 공사가 시작된다고 하던데 그래서 벽들이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벽 안에 단열재를 채워 넣은 모습도 보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난방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침실 천정도 생겼다. 서까래가 보이는 천정은 비용이나 효과를 생각해서 몇 군데만 살릴 생각이다. 이제 월요일부터는 미장이 시작된다. 임정희 목수님은 마당에서 안채 쪽으로 보이는 문과 벽을 장식할 문틀 형태를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며 고르라고 했고 우리는 심플한 디자인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심플하고 군더더기 없는 콘셉트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야겠다.



현장에서 나와 삼성전자 매장에 가서 냉장고와 에어컨을 살펴보았다. 지난주에도 다녀왔지만 또 가는 것이다. 아내는 김치냉장고와 냉동실, 냉장실이 모두 필요한 주방 상황과 동선 등을 고려해 냉장고를 고민하고 있다. 공간으로만 따지면 삼성의 비스포크가 가장 적격이긴 한데 너무 비싸다. 더구나 아내나 나나 삼성 제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LG는 왜 비스포크 같은 걸 안 만드는 거야?"라고 화를 내곤 한다. 삼성전자 매장에서 이것저것 견적을 맞춰 본 우리는 다시 LG전자 매장으로 가서 냉장고를 살펴보았다. 한참을 살펴보니 비스포크는 아니지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제품이 눈에 띄었다. 아내는 수첩을 꺼내 메모해 놓은 냉장고의 용량과 높이 등을 세심히 비교한 뒤 냉장고를 사기로 결정했다. 더구나 이 제품은 절전형이라 나중에 사진을 찍어서 정부 기관에 제출하면 보상금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신한카드를 만들면 또 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아내는 뭔가 구입하느라 새 카드를 만드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므로 신한카드 신규는 포기하고 국민카드로 결제를 하기로 했다. 국민카드는 12개월 무이자 할부가 가능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아내는 여러 번 삼성과 LG를 오가며 발품을 판 결과 269만 원까지 올라갔던 냉장고 구입 금액을 180만 원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며 뿌듯해했다.


냉장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비로소 TV가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지금 쓰고 있는 TV는 너무 크고 오래되어서 한옥에서는 새 TV로 갈아타기로 했던 것이다. 엄청 얇고 선명한 TV들이 즐비했지만 우리는 100만 원 안짝 가격대의 중간 크기를 골랐다. 혹시 이 TV로 넷플릭스 같은 것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아내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크롬캐스트를 연결 안 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이사를 가면 TV로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 TV가 너무 재미없는데 잘 됐다. TV도 국민카드 12개월 할부로 결제했더니 알루미늄 박스 세트와 찜기 세트를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4시가 넘어서 나는 그 선물들을 집으로 가져다 두고 다시 내려오는 동안 아내는 '리틀 마나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손님을 맞기로 했다.


5시가 되기 직전 온수진 조유겸 부부가 먼저 도착했다. 한옥 수리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한 친구도 같이 왔다. 두 부부는 자신이 살던 한옥보다 집이 훨씬 크고 반듯하다며 감탄했다. 목재들도 모두 튼실하고 네모 반듯한 구조도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역시 먼저 살아 본 분들이라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많았다. 조유겸 씨는 특히 마당이 깊은 게 마음에 든다면서 마당과 댓돌 등을 잘 살리면 더욱 멋진 한옥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우리가 마당에 마사토를 깔 생각이라고 했더니 기장석도 예쁘고 지금 바닥이 시멘트가 아닌 강화마당이라 그걸 그대로 살리는 게 더 좋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마사토는 원래 궁에서만 깔던 소재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서 경비 목적까지 겸해 깔던 소재라는 것이었다. 귀가 얇은 우리 부부는 당장 "아, 그렇구나." "그게 좋겠네요!"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남매 이제 출발했어요."라는 카톡 메시지가 울렸다. 하 남매란 서촌 그 책방의 하영남 사장님과 그 이웃에 사는 하성훈 이사님을 일컫는 말인데, 물론 실제 남매는 아니다. 온수진 조유겸 부부는 먼저 구포국수에 가서 뭘 좀 먹고 있기로 했고 우리 부부는 남아서 하 남매와 강원모 실장님을 맞아 공사 과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촌에 있는 한옥에 비해 비교적 커 보이는 구조 때문인지 다들 생각보다 집이 넓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강원모 실장님은 예전에 한컴 다니던 시절에 퇴근 후 매일 저녁 혼자 집 공사를 하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똥손'인 나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한 능력자들의 이야기였다.


구포국수에 모인 사람들은 오징어튀김과 두부김치, 파전 등 이런저런 안주를 시켜 막걸리로 건배를 했다. 함께 온 어해용 씨는 암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용인에 산다고 했다. 용인까지면 먼 거리 아닌가 했더니 알아서 잘 가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조유겸 씨가 자신과 어해용 씨와 편성준 씨는 모두 동갑이니까 앞으로 그냥 유겸, 해용, 성준으로 부르는 게 어떠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호칭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이 차를 가자는 말이 나와 덴뿌라는 팔지 않는 술집 '덴뿌라'와 유명한 시인을 만났던 횟집 '만섬포차' 중 어디를 갈 것인가 잠깐 망설이다가 아내가 만섬포차로 결정을 했다. 이 차로 가는 도중 어해용 씨는 조용히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만섬포차에서도 회 세트에 소주를 많이 마셨다. 술을 못 마시는 조유겸 씨 말고는 다들 꽤 취했지만 아무도 큰 실수를 하거나 예의에 어긋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다들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건배를 했고 또 건배를 했고 또 건배를...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실에 내가 마시려고 따 놓은 소주 페트병과 튀김 만두가 보였다. 어제 잘 헤어져서 오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와 안주를 샀던 게 기억났다. 기를 쓰고 술과 안주를 사 와서는 한 잔인가 마시고 그대로 뻗어버린 것이었다. 옆을 보니 아내는 아직 자고 있었고 고양이 순자는 괜히 거실을 돌아다며 울고 있었다. 조금 더 자야지 하고 자리에 누워 있던 나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싱크대에서 그릇을 찾아들고 콩나물국밥집을 향해 갔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혼자 동네 콩나물국밥집으로 내려가서 한 그릇은 먹고 한 그릇은 포장을 해오는 습성이 있다. 아내는 대개 술이 완전히 깨는 오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오늘은 좋아하는 'TV 동물농장'도 보지 못한 채 계속 누워서 자고 있다. 콩나물국밥집으로 가다가 한옥집에 잠깐 들렀다. 아침 햇볕이 내려쬐는 마당과 작업실을 보고 싶어서였다. 일요일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 현장은 고요하고 따스했다. 나는 작업실 내 책상이 놓일 자리로 가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햇살이 눈부셨다. 앞으로 매일 아침 이런 햇빛을 맞이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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