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형 한옥 집수리 22일째
새벽 6시에 고은정의 제철음식학교 '시의적절약선학교' 수업 때문에 지라산으로 가는 아내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TV도 켜지 않은 채 콜드 플레이의 노래들을 들으며 게으름을 피웠다.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쓴 글을 읽고는 충동적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고 연필로 줄을 치고 귀퉁이를 접고 하며 책을 읽다가 아내가 예전에 연필로 그어놓은 밑줄들을 만나기도 했다. 같은 책을 시간차를 두고 읽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경험이다. 아내가 줄 친 곳은 작가와 조르바가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앉아서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는 구절이었다. 아, 이 사람도 이 구절에서 숨을 멈췄구나. 그리고 나도 이 구절에서는 페이지 넘기는 손이 자동으로 멈춰 섰구나. 내친김에 리디북스에 들어가 장석주의 [조르바의 인생수업]도 샀다. 시인이자 산문가인 장석주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스무 번도 넘게 읽었다고 한다. 그가 쓴 '조르바 읽기'에 관한 책 조르바의 인생수업의 서문에도 아름답고 정다운 문장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글이다.
우리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들, 교통사고 같이 예고 없는 사고들, 지진 따위의 자연재해들로 비명횡사를 맞는 원인-사건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은 27세에 죽었다. 예수는 33세에 죽고, 모차르트는 35세에 죽고, 반 고호는 37세에 죽었다. 이들은 천재적 재능으로 인류사를 바꾼 사람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짧은 수명을 살다 갔다. 나는 용케도 27세를 넘기고, 33세를 넘기고, 37세마저 넘긴 채 살아남았다. 어느덧 불혹과 지천명을 너끈히 넘겼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 따른 탓이다. 인격이 고매하거나 평소에 이타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우연히, 거듭되는 우연이 쌓여 그렇게 된 것이다.
장석주의 책과 카잔차키스의 책을 번갈아 읽다가 문득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나폴레옹 과자점이 있는 성북동 사거리 큰길을 건너자 삼선교 길엔 벚꽃들이 지전으로 피어 있었다. 꽃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상주식당>이라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 44년 간 식당을 했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청국장을 먹은 뒤 한옥 수리 현장으로 갔다. 김정국 목수님, 김치열 목수님과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임정희 목수님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벽체들을 손보고 있었다. 아내가 지리산 가는 바람에 나 혼자 왔다고 했더니 이필식 미장 장인께서 "거기 가느라 오늘은 못 왔구먼"이라고 알은체를 했다. 아내와 내가 쓸 부부 침실 벽에 알루미늄 호일처럼 번쩍이는 난방재가 붙어 있길래 "이건 임시로 붙여 놓은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임 목수님이 웃으며 그 위에 또 작업을 하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인슐레이션을 가리켰다. 침실과 게스트룸 사이엔 난방재를 더 두껍게 보강하고 수납장도 넣을 거라서 소음 문제도 해결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게스트룸에서 섹스를 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라고 김성준 선배와 농담하던 장면이 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임 목수님이 또 화를 낼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임 목수님이 애써주는 덕분에 따뜻하고 포근한 부부 침실이 될 것이다.
이필식 장인이 서까래가 보이는 흰 벽을 작은 흙손으로 세심하게 덧바르고 있었다. 크기가 다른 세 가지 흙손을 한 손에 쥐고 하나씩 꺼내 쓰는 모습은 언제 봐도 무슨 묘기처럼 보인다. 정말 이쁘네요,라고 말하자 아, 정말 이쁘죠!라고 이필식 사장님도 웃으며 말했다. 자기가 하는 작업인데도 그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모양새에 감탄이 나오는 모양이다. 다른 공사 현장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 집을 고쳐주는 분들은 모두 인성이 밝고 순해서 내가 큰 복을 받은 느낌이다. 욕실은 ABS 도어를 달 거고 바닥은 강화마루와 우레탄으로 할 것이라는 얘기는 어제 아내와 같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 혼자서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기도 뭐하고 해서 "그럼, 전 가볼게요."라고 말하고 얼른 마당으로 나서더니 임 목수님이 빙긋이 웃었다. 아내가 없으니 평소보다 빨리 사라지는 나의 숫기 없음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나는 괜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큰길까지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일요일인 오늘 아침엔 배가 고프다고 새벽부터 난리를 치는 순자에게 사료를 꺼내 주고는 샤워를 한 뒤 산책이나 할까 하다가 한옥 공사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늘 소란한 현장이지만 작업이 없는 일요일 아침만큼은 너무도 조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나의 작업실 창문이 보였다. 작동을 멈춘 공구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고 창틀엔 작업 도구들과 음료수 페트병 들이 놓여 있다. 바닥엔 임정희 목수님이 벗어놓고 간 운동화도 보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 고요의 순간들을 만끽했다. 이것저것 걱정이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내일부터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렇게 조용하고 침착한 집안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기만 하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조용히 대문을 닫고 나왔다.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