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사장님은 까칠하셔

도시형한옥 수리 37일째

by 편성준

오전 내내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파란대문집에서 작업을 했다. 친한 친구의 요청으로 뭔가 카피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일이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많이는 못했다. 어쨌든 전날 밤부터 애써 쓴 세 가지 정도의 카피와 슬로건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이 중 하나라도 쓸모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한옥 공사현장에 들렀다가 아내와 헤어져 은행으로 갔다. 오늘은 학동역 쪽에 있는 은행으로 가야 했는데 뭔가 심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은행 직원도 인상이 까칠하고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직원이 잠깐 언성을 높이길래(원래 말투가 그런지도 모른다) 나도 같이 언성을 높이다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잘못한 일인데, 하고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다 하고 말았다. 언제쯤 나도 심란하지 않은 일로 은행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은행을 나왔다.


은행에서 나와 근처에 계시는 옛 직장 선배님 사무실에 찾아가 잠깐 수다를 떨고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스타벅스에 있었는데 가운데 동그란 테이블에 있는 세 여자 중 하나가 놀랍도록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소리를 지르는 거냐고 물었더니 저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약 한 시간 전부터 계속 저러고 있다는 아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 넓은 커피숍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그 여자와 그 여자 친구뿐이었다. 나는 커피도 시키지 않은 채 아내와 잠깐 대화를 시도하다가 여자들이 너무 시끄러우니 그만 나가자고 말했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한옥 수리 현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마침 물받이 공사를 끝낸 사장님과 조수분이 철수 준비를 하고 계셨다. 동으로 만들어진 물받이는 탄탄하고 날렵했다. 특히 밖에서 보이는 처마 끝의 날카로움이 돋보였다. 사장님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은 물받이 가장자리를 접지 않고 예전 방식처럼 말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물받이 각도도 60도로 꺾어 더 보기가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를 60도로 꺾은 건지 모르는 내가 "어디를 60도로 꺾었다는 거예요, 저기요?"라고 묻자 사장님은 물받이를 가리키며 "저기, 저기!"라고 외쳤다. 바닥이 깊은 마당에 서서 둘 다 지붕 위를 가리키고 있으니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냥 "아. 네..."하고 아는 척을 하고 말았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본다고 하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아내는 가방에서 줄자를 꺼내 화단의 사이즈를 쟀다. 혼자서 재다가 좀 긴 곳은 나에게 줄자를 좀 잡아달라고도 했는데 손으로 하는 일엔 뭐든 서툰 내가 보조를 잘 못 맞춰서 약간 핀잔을 듣기도 했다. 페인트를 칠하던 사장님은 흰색 페인트로 기본 작업을 다 마치고 어딘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안방과 게스트룸의 페인트 컬러를 정해달며 컬러차트를 주길래 다음날 화사한 톤의 여린 그린과 블루 계열을 표시해 가져 갔더니 "카페도 아니고.. 술집 할 거 아니죠?" 라며 못마땅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내와 나는 당황해서 "아, 그런 건 아니구요. 그럼 좀 더 연한 걸로 할까요?"라며 후퇴를 했다. 내 방 컬러를 내 맘대로 못 정하다니. 조수도 없이 혼자 일하는 참으로 까칠한 분이었다. 그러나 사실 일을 할 땐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좋다.

보일러실에 새로 생긴 문과 선반 등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골목 끝에서 승합차 하나가 서더니 빵, 하고 클랙션을 울렸다. 임정희 목수님이 반갑게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임 목수님은 요즘 아침 일찍 현장에 들러 체크를 하고 저녁에 또 한 번 들른다고 했다. 우리는 웃으며 다시 한옥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냉장고를 언제 들여올지 임 목수님과 상의를 했다. 바닥의 에폭시를 깔고 그게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보일러를 급하게 돌리면 다 갈라져 버리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해야 한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거실과 작업실 등에 칠해진 흰색 페인트를 바라보며 '페인트 사장님이 무척 까칠하시더라'라고 말했더니 임 목수님은 웃으면서 자신은 그런 사람과 일하는 걸 즐긴다고 했다. 까칠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내가 내 작업실 벽의 희색 페인트가 위쪽은 밝은 흰색이고 아래는 어두운 흰색인 게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하자 임 목수님은 비가 오는 날 물이 튀는 것까지 배려해서 색을 고른 것이라고 보충설명을 해줬다. 페인트 사장님이 성격은 까칠해도 일은 참 매끄럽게 하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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