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지어진 이 한옥은 앞으로 어떤 집이 될까?

도시형 한옥 수리 39일째

by 편성준

마당으로 들어서니 타일과 욕조가 도착해 있었다. 지난번에 아내와 내가 임정희 목수님과 함께 수원에 가서 골랐던 타일과 변기 등 도기들이다. 타일 박스 위에 타일 견본이 한 장씩 붙어 있어서 대충 완성될 욕실과 바닥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 최고의 타일공이라는 ‘ 곽 사장님’의 솜씨만 기다리면 된다.


칠은 페인트 사장님 혼자 집요하고 치밀하게 작업하는 바람에 착착 진행되고 있다. 흰색은 이미 다 칠해졌고 다른 색을 칠할 공간을 전동 롤러로 정비(?)하고 계셨다. 우리 집은 거의 모든 벽을 친환경 페인트로 작업하고 있다. 페인트 사장님은 대문 옆 화장실 바닥 정도만 ‘쎈 거’로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옆에 수도도 있고 해서 거기는 다른 데보다 방수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콘센트와 전기 스위치 박스도 도착했다. 임 목수님이 선택한 콘센트는 독일제 융(jung)제품인데 보통 콘센트나 스위치보다 열 배 가까이나 비싸다고 한다. “이거는 정 사장님(전기 설비 사장님)이 욕하는 거예요. 작업하기 힘드니까.”라고 임 목수님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콘센트는 자리를 잡고 나사를 조이면 대충 들어맞는데 이 제품은 아주 정확하게 작업하지 않으면 고정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콘센트가 다른 콘센트와 연결되는 방식도 매우 거추장스럽고 까다롭다고 했다. 임 목수님이 이 제품을 고집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깔끔하고 예뻐서다. 이번 공사는 다 이런 식이다. 임 목수님이 자재나 재료에서 항상 우리보다 더 욕심을 내니 아내와 나는 오히려 걱정을 하며 말려야 할 지경이다.

아내는 주방 자리에 가서 싱크대 앞에 아일랜드식탁에 내기로 한 수전을 없애는 문제를 의논했다. 식탁에 작은 싱크볼을 하나 낼까 했는데 그러다 보니 식탁 면적을 너무 잡아먹고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도 보기에 안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식탁 아래 수도관은 놔두되 일단 평평한 목재 식탁을 얹어 쓰다가 나중에 물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다시 검토해보기로 했다.

공사 현장을 빠져나와 액자를 부탁해 놓은 유리집으로 갔다. 사장님이 외출 중인데 5분 정도 걸린다고 해서 아내 먼저 성북동 콩집에 가 있으라고 하고 나 혼자 가게 앞에서 사장님을 기다렸다. 벽에서 뜯어낸 일본 신문 벽지 쪼가리 표구를 부탁해 놨기 때문이다. 공사 초기, 거실벽에 발라졌던 도배지를 뜯어내니 그 흔적이 무려 일곱 겹이었는데 맨 안쪽에 일본 신문지를 발랐던 게 발견된 것이다. 우리는 신기해하면서 그 벽지를 달라고 해 비닐봉지에 애지중지 넣어 집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무슨 신문인지 알 수 없는 이 종이는 마침 제호 부분이었는데 ‘지방종합판’이라는 세로닫이 제목 옆으로 ‘소화 14년(昭和十四年)’이라는 날짜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한창 전쟁 중인 시절이라 신문엔 전장의 군인들 모습이 보이고 남군이 어쨌네, 북군이 어쨌네 하는 내용이 일어로 쓰여있다. 소화 14년이면 1939년이다. 요즘처럼 신문지가 흔하지 않던 시절임을 고려해보면 일, 이 년 후에 이 종이를 벽에 바르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의 나이는 대략 1940년 경부터라는 추측이 나온다. 임 목수님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등기소에서 ‘폐쇄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집의 기원을 알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사장님이 완성된 액자를 가지고 나오셨다. 액자는 입체로 만들어져 고급스럽다. 사장님은 종이가 너무 낡아 잘못하면 부서질 수 있으니 가급적 흔들거나 충격을 주지 말라고 했다. 액자 정 중앙에 신문지가 위치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수평을 잡았다고 했다. 나는 지갑에서 현금 십만 원을 꺼내 드리고 이만 원을 거슬러 받았다. 이 액자는 아내 말대로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공간에 걸어야겠다. 집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료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숍으로 가고 있는데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를 다닐 때 받았던 마이너스 대출금 이천만 원을 5월 7일 만기일에 갚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5월 9일에 잔금을 치르고 이사를 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대출금 상환이 하필 5월 7일이다. 며칠간 은행을 오가고 계속 통화를 하면서 갖가지 노력을 해보았지만 결국은 다른 수를 찾지 못했다. 내가 현재 직장을 다니지 않고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 납입도 그들이 원하는 상태가 아닌지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은행은 냉정하다. 아니, 사실 냉정한 건 은행이 아니라 세상이다. 아내는 커피숍에서 무겁게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전체 자금을 계산해 보고는 뭔가 가능한 대책을 몇 가지 내놓았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 게 이렇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내가 “우리는 왜 이렇게 늘 찰랑찰랑 돈이 모자라는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걸까?” 하고 속상해했더니 아내는 다른 부자들도 마찬가지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최근에 굉장히 성공한 사업가가 돈 문제로 곤란을 겪고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긴 하다. 돈이 많은 사람도 불행하고 없는 사람도 불행하니 세상은 참 골고루 ‘불행이 디폴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엔 대학 동창 재섭과 만나기로 해서 홍대 앞 몽로(로칸다몽로)로 갔다. 오랜만에 간 집인데 코로나 19 때문인지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었다. 몽로가 이렇게 한산한 건 처음이었다. 문현숙 지배인이 마스크를 쓴 채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요리를 먹던 도중 박찬일 요리사가 마스크를 쓴 채 복도로 지나가다가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문 지배인이 담갔다는 백김치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는 문 지배인이 추천하는 요리에 문배주 40도짜리를 얼음에 섞어 마셨다. 아내는 재섭과 내가 무척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셋이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지도 않아서 놀랐다고 말했고, 우리는 많이 친한 게 이 정도라고 말하며 낄낄낄 웃었다. 재섭이는 학교 다닐 때 내가 너무 특이한 놈이라 더 이상 친해지기는 어려웠다는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리하고 있는 한옥 이야기가 나왔다. 재섭은 집을 수리한다는 게 대단히 힘들고 심란할 텐데 어떻게 두 번이나 그런 일을 하게 되었냐고 하면서 웃었다. 이런 프로젝트는 힘든 게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돈 문제고 또 하나는 사람 문제다. 돈 문제야 날마다 생각지도 않던 일이 터지는 바람에 요즘 매일 한숨투성이인 삶을 살고 있지만 사람 문제만큼은 이전에 한 번 합을 맞춰봤던 사람들이라 큰 걱정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임 목수님은 한옥 전문 목수라 우리 집 공사에 딱이고 본인도 처음부터 우리 집을 마음에 들어해서 의욕적으로 덤비고 있으니 금상첨화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수리하면서 싸우는 이유는 대부분 서로의 의견이 다르고 욕심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왜 이 집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또 부딪히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도대체 이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두 사람 다 직장을 그만둬서 당장 눈에 보이는 수입도 없는데 매일매일 공사는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이 글을 쓰고 있는데 가스보일러 두 개 중 하나는 고장이 나서 새 제품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전화가 임 목수님에게서 왔다. 예상외의 비용이 또 추가된 것이다). 공사를 마치고 5월 9일에 이사를 하고 나면 또 다른 고민도 시작해야 한다. 집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은 물론 당장의 생활비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지금 힘들고 괴롭지만 이 집은 결국 우리 두 사람의 터전이 될 것이다. 아내는 이 곳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가치들을 기획할 것이고 나는 작업실에서 내가 쓰고 싶던 글들을 쓰면서 원하던 삶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 나갈 것이다. 날짜는 미정이지만 우리 집에 꼭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한 분들을 위한 ‘오픈 하우스’도 기획하고 있다. 소화 14년.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경에 생겨난 이 도시형 한옥은 앞으로 어떤 집이 될 것인가. 다른 누구보다도 아내와 내가 제일 궁금하다. 그 의문에 대한 키 또한 우리가 쥐고 있기에 더욱 가슴이 뛴다.


몽로에서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은 우리는 딱 반씩 갈라서 계산을 하고 나와 헤어졌다. 둘이 내고 남은 우수리 돈 몇천 원은 아내가 현금으로 냈다. 재섭은 구글 지도에 맛집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서 자기 집까지 가는 시내버스도 있다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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