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소행성
예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갔던 직장을 석 달 만에 그만두고 광고아카데미라는 카피 학원에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수강생 중에 '미스 박'이라고 불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여자분이 하나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우리나라 카피라이터 중 최고 어른이셨던 이낙운 선생이 그녀에게 '미스...'라고 부르려 하자 "저는 미스 박이 아니고 박**입니다. 그러니 박** 씨라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정색을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음악을 무척 좋아해서 대학에서도 음악써클을 했다는데 졸업 후에 운 좋게도 싱어송라이터 조동진이 운영하는 사무실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조동진 씨는 **씨를 뭐라고 불러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미스 박이라고 부르긴 하는데요... 그냥 미스 박, 이렇게 부르지 않고 미스 박~ 이렇게 점잖게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사람을 너무 신봉하다 보면 이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사를 오면서 아내는 마당에 만든 작은 화단에 수양매화와 불두화, 모란, 미스김라일락, 차자나무 등을 심었다. 미스김라일락은 이 꽃의 품종을 만든 미 군정청 소속 학자의 자료 정리를 도와주던 타이피스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불러볼 때마다 약간 애잔한 느낌이 든다. 오늘 아침에 아내에게 미스김라일락은 언제 피는 꽃이냐고 물었더니 쟤는 봄꽃이라고 했다. 지금이 봄 아니냐고 했더니 봄은 벌써 지나갔단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는 내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있는 5월 하순이다. 집 고치고 이사하느라 2월부터 5월까지의 나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해마다 결혼과 생일 즈음엔 여행을 갔는데 올해는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긴 처음 살아보는 한옥이라 그런지 아직은 어디로 잠시 여행을 온 기분이다. 날마다 여행 와서 마당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옥의 아침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