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y 23. 2020

스님, 잠 좀 자게 해 주세요

성북동 소행성

어젯밤에 성북동 소행성 한옥 게스트로 류왕보 대표님이 오셨다. 우리 집에 혼자 와서 숙박을 하는 경우는 류 대표님이 처음이다. 이른 아침, 아내가 간단히 준비한 콩물과 토마토를 함께 먹고 마침 시간에 맞춰 도착한 이소영 대표님까지 합류해 길상사로 산책을 갔다. 류 대표님은 가끔 주말 아침에 번개처럼 커피 모임을 하는데 오늘은 성북동에서 산책을 하고 아침을 먹기로 한 것이었다. 이소영 대표는 자신은 워낙 저질 체력이라 웬만하면 차를 타고 다니는데 오늘은 유난히 걷기를 좋아하는 세 사람을 만나 덕분에 이렇게 일찍 길상사까지 걸어가게 되었다며 엄살을 부렸지만 가는 곳마다 꽃들이 놓여있는 성북동 큰길과 길상사로 올라가는 언덕 저택들에 퍼져 있는 담쟁이넝쿨을 보자 곧 신이 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상사에 들어서니 입구에 '민망한 옷차림 랩스커트로 잠시 가려 주세요'라는 안내문과 함께 보자기 같은 치마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내는 "별로 민망하진 않지만"이라고 하면서 레깅스 위에 랩스커트를 걸쳤다. 경내는 조용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쓴 채 종교 화합 차원에서 이웃 성당이 기증한 성모상이 있는 경내의 모습을 새삼 둘러보며 법정스님이 보여줬던 '꼿꼿한 포용력'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법정스님을 모신 진영각에 들어가 스님의 유언을 다시 살펴보다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주면 고맙겠다."라고 쓴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스님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스님에게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해주던 그 사람은 책들을 받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밖으로 나와 툇마루에 놓인 '스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을 단 방명록을 들춰보았다. 스님이 그립다는 사람도 있고 오랜만에 길상사에 오니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 건강이나 사업 번창을 비는 사람도 있었는데 가장 웃기는 건 "스님, 밤에 잠 좀 잘 자게 해 주세요."라고 쓴 글이었다. 커플의 이름 밑에는 '불면증 좀 낳게 해 주세요'라고도 쓰여 있었다. ‘낫게’가 아니라 ‘낳게’란다. 그냥 돌아가신 스님에게 쓰는 방명록인데 이렇게 구체적인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은 법정스님을 영험한 귀신쯤으로  생각했던 걸까. 세상엔 참 별 생각을 다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아내가 안동할머니청국장 어떠냐고 해서 거기로 가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진이 본부장님과 지금은 농사꾼이 된 조성룡 선배님이 오셨다. 얼마 전 우리가 너무 커서 버리려고 내놨던 의자를 가지러 오신 것이었다. 유왕보 대표와 이소영 대표가 돌아가고 조성룡 선배님은 안으로 들아와 한옥을 구경했다. 아침부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낯선 사람을 좋아하던 순자도 약간 지친 표정이었다. 오늘은 '독하다 토요일'이 우리 집에서 열리는 첫날이고 내일은 내 생일이라 회원들이 앞다투어 술과 음식을 들고 오겠다는 내용으로 카톡방이 달궈졌다  늘 책보다는 먹고 마시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우리 모임이, 나는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븐일레븐 커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