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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27. 2020

책을 다 읽은 사람이 없는 거야?

독하다 토요일 - 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와중에 저와 윤혜자 씨는 어이 없게도 낡은 한옥을 하나 사서 고치느라 꼬박 세 달을 보냈습니다. 집을 고치고 이사를 한다는 게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지난 달 있었던 독하다 토요일 모임 후기(김해진의 [단순한 진심] 편)도 아직 쓰지를 못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어찌어찌 집이 다 수리되어 저희가 이사를 하고 나니 독하다 토요일 모임을 저희집에서 하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마루에 테이블과 의자가 들어오기 전이지만 어쨌든 모임을 하기에 부족함은 없어보였습니다. 회원들이 와서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다가 마루에 모여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20년 5월 23일 오후 2시. 독하다 토요일 시즌4의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임 장소가 저희집이기도 하고 또 그 다음날이 제 생일이라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싸 가지고 오겠다는 얘기가 단체카톡방을 달구고 있었습니다.

제사보다는 젯밥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일까요. 그날 읽을 소설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꼬엔의 [주군의 여인]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저희가 2년 전부터 한국 소설만 읽는 모임으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거기서 좀 벗어나 보자 생각에서 외국 소설을 하나 읽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모인 사람 중 책을 끝까지 읽고 온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밀란 쿤데라 등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백선희 선생이 강력하게 추천하셨다는 책인데 지난 세기에 프랑스에선 굉장한 화제였다고 합니다. 백선희 선생이 꼭 번역해 보고 싶은 작품이라 꼽아놨었지만 작년에 이미 다른 제목으로 출간이 되어서 섭섭해 하셨다는 후문을 소설가 김탁환 선생에게서 전해 듣고 제가 강력 추천을 했죠. 그런데 일단 책이 너무 두꺼웠습니다. 두 권이나 되는 데다가 문체는 매우 장황하고 수다스러웠습니다. 모임 전에 저희 집에 잠깐 놀러왔던 서동현 씨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수다스럽고 쓸데 없는 얘기가 많은 긴 문장을 싫어하는데, 주군의 여인에 나오는 아리안의 남편 아드리앵 됨이 딱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시부터 툇마루에도 앉고 마루에도 앉아서 책을 읽다가 세 시에 모일 생각이었으니 모두들 책을 읽다가 말았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자꾸 책 얘기를 꺼냈습니다. 김은주 씨는 이 책이 [멋진 신세계]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져서 그런지 몰라도 올더스 헉슬리와 문체가 매우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는 박재희 씨는 처음엔 쏟아지는 수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읽다 보니 작가의 촘촘한 문장에 압도되어 이 사람이 쓴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책은 빌려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자기 책이 되려면 밑줄도 긋고 매모도 하고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소설은 1930년대에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다니던 바람둥이 고위 공직자 쏠랄이 자신의 수하 직원의 아내인 아리안과 바람이 나 도피 행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람을 피우기 전 피해자인 남편 아드리앵 됨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에만 이백 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고 아내인 아리안이 독백을 하는 부분은 몇 페이지에 걸쳐 쉼표나 마침표가 하나도 없는 문장이 나열되기도 합니다. 저는 도대채 이런 소설이 어떻게 대중적·문학적으로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백만 부가 넘게 팔리고 “현대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새로운 안나 까레니나 혹은 마담 보바리의 사랑 이야기”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았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확실히 우리와 문화적 토양이 다른 것 같았습니다. 1968년에 출간되면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1998년에 재출간되어 2주 만에 10만부가 팔리며 큰 화제를 낳았고 심지어 2012년에 프랑스·룩셈베르그·독일·벨기에·스위스·영국 합작 영화로 제작이 되었더군요. 잘 생긴 주인공 쏠랄 역엔 역시 잘 생긴 배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나왔구요. 사람들이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다들 어이 없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정아름 씨는 쏠랄을 초대한 아드리앵 됨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유치하고 속물적이라 작가가 그 당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기 위해 그렇게 썼다는 걸 알면서도 서글프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김은주 씨가 '벌어벗은 임금님'이 생각난다고도 했습니다. 한참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뒤늦게 임기홍 씨가 등장해 책을 읽었냐는 질문에 "안 읽었어요."라는 대답을 하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고 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자신은 이미 텍스트를 다 읽었다고 하면서 남는 시간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원서로 읽어 위화감을 조성하곤 했던 임기홍 씨가 못 읽었다는 얘기를 하자 다들 마음이 팍 놓이면서 신이 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이견이 없었습니다. 알베르 꼬엔은 소설의 주인공 쏠랄이나 됨처럼 실제로 20년 넘게 국제노동기구, 국제난민기구 등에서 국제공무원으로 일하며 어떤 문학사조나 문예운동에도 관여하지 않고 프랑스 문단과도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적인 문학적 세계관을 구축해온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라고 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유머 감각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유머가 너무 장황하고 오밀조밀해서 결국 독자가 좀 지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흥청망청했던 1930년대를 다워서 그런지 어떤 이는 [위대한 캐츠비]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떠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비커밍 제인]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윤혜자 씨는 예전에 소지섭과 공효진이 출연했던 드라마 ‘주군의 태양’이 이 소설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 묻길래 제가 그 드라마 주인공이 남자는 주 씨였고 여자는 이름이 태양이었을 뿐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더니 매우 허탈해 하기도 했습니다.


김은주 씨가 [미드나잇 인 파리] 얘기 도중 당시 미국은 경제공황과 금주법 등이 기세를 떨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물가가 싼 파리로 몰렸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파리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이나 진고개도 밤마다 전깃불이 휘황했다는 저의 얘기를 시작으로 고종이 토머스 에디슨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에디슨의 수제자가 한국에 왔던 이야기도 했고 1930년대 유럽 애기를 더 하려고 했으나 운혜자 씨가 준비한 돼지수육과 김하늬 씨가 가져온 샐러드, 초밥, 야채, 와인 등의 음식과 술이 나오는 바람에 독하다 토요일은 졸지에 술판으로 변했습니다.


술을 마시며 한옥을 고치고 이사를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임기홍 씨에게 기타를 꺼내라고 해서 일단 어쿠스틱 기타만 꺼내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임기홍 씨가 "음주 후엔 가무죠."라고 외치며 기타를 치기 시작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제가 먼저 노래를 한 곡 불렀고 임기홍 씨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전 H.O.T와 G.O.D의 팬이었던 정아름 씨와  김하늬 씨가 번갈아 그들의 힠트곡을 부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로 웃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덥기도 해서 문을 모두 닫고 에어컨을 가동한 채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습니다. 금요일에 와서 숙박을 했던 손님의 아침 식사 준비 등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던 윤혜자 씨는 9시 경에 방으로 들어가 뻗었고 나머지는 11시까지 놀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알베르 꼬엔의 소설 [주군의 여인] 1,2권은 다시 책꽂이로 돌아갔고 저는 혼자 방대한 분량의 설거지를 했습니다. 설거지를 다 마치고 손을 씻으니 5월 24일, 제 생일이더군요. 깨끗해진 주방을 쳐다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달엔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습니다. 디디의 우산(황정은), 대도시의 사랑법(박상영), 단순한 진심(조해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주군의 여인(알베르 꼬엔)에 이어 어느덧 시즌 4 마지막 작품이네요. 다음달에 뵙겠습니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편 후기도 시간을 내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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