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의 연극 [해방의 서울]
연극을 보러 갈 때마다 놀라는 것은 제목에서 느껴지던 막연한 기대감이 구체적인 장소와 인물들, 대사 등을 만나면서 정말로 그 실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 본 '해방의 서울'이라는 제목의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읽고 간 시놉 덕분에 서울에 있는 '기무라 키네마'라는 영화사에서 해방되던 날 영화를 찍던 이야기로구나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평상에 길게 누워 문하생에게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충고하며 배우들이 지켜야 할 자존심 얘기를 늘어놓다가 전 남편 욕까지 하고 있는 배우 지화정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내가 그날 그 장소의 목격자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젊은 배우 장강과 영화사 직원 이 부장, 상대 배우이자 전 남편인 양철 등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전후 맥락을 점점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하필 천왕의 항복 선언이 발표되던 1945년 8월 15일에 <사쿠라는 피었는데>라는 선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희곡의 뼈대는 이런 구체적인 상상력들이 하나 하나 레이어로 깔리면서 관객들을 그 날 그 장소로 데려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연극은 친일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서나 펼쳐질 수 있는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의 이야기다. 다만 그게 해방되는 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서 좀 더 극적일 뿐이다. 굉장히 시니컬하면서도 웃기는 대사들은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에 의해 쫀쫀하게 살아난다. 지화정 역을 맡은 강지은의 진지한 평안도 사투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웃음이 나고 기무라 사장의 아들 신고 역을 맡은 이원재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 탈영병으로 나왔을 때 보여줬던 심각함에 코믹함까지 더해 객석을 들었다 놨다 한다. 희극의 묘미는 배우들이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코믹한 상황을 연기할 때 때 더욱 배가되는 법인데 이 연극이 그랬다. 90분의 러닝타임 내내 즐거웠고 마지막 처리까지 깔금해서 뒷맛이 좋았다.
나는 박근형 작가가 좋다. 그가 쓰고 연출했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운이 좋아 남산연극센터에서 두 번이나 보았다. [해방의 서울]은 그제 아는 배우에게 이 연극 얘기를 듣고는 너무 보고싶다 했지만 이미 전회 매진이라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배우가 표를 구해보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표를 구했다는 카톡이 왔다. 아내와 나는 너무 좋아서 만세를 불렀지만 우리에게 온 행운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제 저녁 선돌극장 티켓박스로 표를 수령하러 갔더니 그 배우가 이미 티켓값을 다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런 고마운 일이, 하면서 연극을 재미있게 보았고 나는 아침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리디북스로 들어가 박근형의 희곡집 <너무 놀라지 마라>를 샀다. 오늘은 너무 놀라지 말고 이 희곡을 읽어야겠다.